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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오늘밤에도 ‘적과의 동침’(?)
  • 전순란
  • 등록 2018-08-24 11:30:03
  • 수정 2018-08-28 11: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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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23일 목요일, 큰비 오다



비오는 소리가 엄마의 젖을 빠는 아가의 목젖 넘어가는 소리 같이 ‘충만한 만족감’을 준다. 나중에 바람이 일어 과일을 떨구고, 나무를 부러뜨리고, 곡식을 쓰러뜨린 후라면 지금의 고마운 빗줄기가 덜 반갑겠지만, 그동안 너무 목말라 누렇게 시들어가던 나무며 가을 들꽃은 우선 한숨 돌릴 게다.


일부러 밤새 휴천재 창문을 열어놓아, 안개 여왕이 기다란 옷자락을 펄럭이며 우리의 잠속을 넘나들게 초대하였다. 바람이 일 때마다 레이스 옷자락을 얼굴에 느끼며 더위를 잊고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축축하다.



보스코가 뒤꼍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마루방을 들여다본다면서 그 시선을 가린다고 성기게 올라온 오죽들을 이리저리 배치한다, 끈으로 묶어서. 마지막으로 멀쑥하게 자란 오죽 한 그루를 비스듬이 눕히더니 나무 허리를 끈으로 묶어 마루방 창문 안에로 끈을 들이밀고 창틈에 괴어 놓았다. 그런데 바람에 흔들리는 오죽의 힘이 커서 창문은 저절로 열리고 그 틈새로 대숲에서 어슬렁거리던 모기들이 떼지어 집안으로 들어왔다!


말하자면 보스코는 트럼프가 세워놓은 국경 장벽을 뚫고 어떻게든 들어오는 멕시코인 밀입국자들과 내통한 첩자다. ‘이왕 들어왔으니 배가 고프면 여러분을 초대한 분과 한 몸이 되시라!’고 보스코 쪽으로 방을 써 붙여도 소용없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온 모기들은 천하일색 글래머라고 반해선지, 먹고 또 먹어도 아직 살집이 풍성한 나만 좋다고 덤빈다. 그래서 유난히 모기를 타는 나는, 보스코가 음모한 ‘모기와의 내통’으로, 어젯밤처럼 오늘 밤에도 ‘적과의 동침’이 되겠다.



식당채 창으로 비가 들이칠 것 같아 문을 닫으러 나가보니 부지런한 인규씨가 벌써 휴천재를 다녀갔다. 빻은 고춧가루 봉지가 현관입구에 놓여 있고 문은 얌전히 닫혀 있다. 도둑이 없어 자동차 문을 열어놓은 채 차키를 그냥 꽂아 놓고 산다. 본관과 식당채 현관문을 다 열어 둔 채로 잠을 자고 외출하고 서울을 오가도 손을 타거나 도둑이 든 일이 없다.


도둑을 안 맞는 진짜 이유는, 집안을 위아래 층으로 털어도 백설공주네 남정들이나 입을 헌옷 헌 신발이 전부여서 가져가도 입을 수도 없으려니와 돈이나 패물이라고는 자취도 없으니 가슴조이고 힘들 ‘도둑 노동’에 대한 정당한 ‘최저임금’이 안 나오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집안에서 뭐 좀 없어져도 ‘나눠 쓴다 생각 하며 살아라!’는 아짐들 훈계가 고작이다.



인규씨네 고추는 무릎 못 쓰는 엄니가 온 밭고랑을 기어다니며 풀을 매고 고추에는 약을 안치기 때문에 딴 집들이 대여섯 물 딸 때에 서너 물밖에 못 딴다. 인규씨가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를 쳐서 비료 대신 소똥을 주므로 고추가 단맛을 낸다. 그 아들에 그 엄니여서 정직하고 올곧아 누구나 그 모자를 보면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사람됨은 교육수준이나 경제수준과 별로 상관이 없음을 배워온 게 이곳 지리산에서 살아온 인생이다.


페친 허오씨가 부탁한 고추가루를 주문했더니 치를 돈에 비해 너무 양이 많아 왜 그리 많이 주냐니까 ‘힘들게 농사졌으니까 욕심 부리지 않고 나눠 먹는 거’라는 인규씨 대답. 빗속에 얼른 마천까지 달려가 돈을 찾아다 엄니한테 드렸다. 큰비가 내리는데도 엄니는 쉬지 못하고 태양초로 말린 고추꼭지를 따고 있었다. 도회지 여인들의 한가한 휴식과 화려한 외출을 위해 시골아낙들은 허리가 꼬부라져도 펼 시간이 없다.



나도 부지런히 상자들을 꾸려 택배 아저씨더러 휴천재에 들를 때(진이네 블루베리 발송으로 날마다 한두 번 택배차가 들어온다) 가져가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큰비가 오는데 혹시 쉬지 않느냐?’고 물으니 ‘죽어야 쉴 수 있는 직업이 택배’란다. 참, 모두 살기 힘들고 거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더 짐이 무겁다.


시아네가 피에몬테 알프스로 주말을 지내러 갔나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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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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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subok212018-08-27 07:44:18

    금년여름에는 모기에 뜯기지 않고 지냈어요.
    마누라가 만원짜리 모기장을 설치해 주었답니다.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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