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5일부터 26일까지 2018세계가정대회를 위해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이번 해외 순방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칠레 전역에서 성직자 성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한 칠레 주교단은 집단 사임서를 제출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 법원은 300여 명의 성직자가 성범죄를 저질러 1,000여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이를 은폐했던 주교와 추기경 등 고위성직자들에 대한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그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이 ‘무관용 원칙’을 선언했던 문제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1974년부터 2004년까지의 성범죄 사실을 조사한 아일랜드 정부의 머피 보고서(Murphy Report)에 따르면, 아일랜드 가톨릭교회에서도 대규모 아동 성범죄가 발생했던 역사가 있다. 결국 이번 방문에서는 가정대회와는 별개로 언론의 관심이 성직자 성범죄에 대한 발언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5일 아일랜드 정부 관계자와 만나, “청소년의 보호와 교육을 책임지는 교회 구성원들에 의한 학대로 벌어진 심각한 스캔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직자 성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주교, 수도 장상, 사제 등 교회 당국이 이 역겨운 범죄들을 해결하는데 실패해 분노를 일으켰고 여전히 가톨릭공동체에는 고통과 부끄러움의 원천으로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09년 이러한 사실을 밝혀낸 머피 보고서 이후 2010년 베네딕토 16세가 아일랜드 가톨릭교회에 보낸 서한을 언급하면서, 최근 공개한 서한에서도 “같은 다짐과 더불어 교회의 이러한 재앙을 뿌리 뽑자는 더 큰 다짐의 필요성을 밝혔다”고 설명했다.
이 연설에 대해 레오 바라드카르(Leo Varadkar) 아일랜드 수상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당신의 직책과 영향력을 사용하여 피해자와 희생자들에게 정의와 진실 그리고 치유를 달라”고 요청했다.
바라드카르 수상은 “죄 없는 아동을 학대한 이들과 이를 도운 이들에게는 무관용 원칙만이 있을 뿐”이라며 “말에 행동이 뒤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덧 붙였다.
특히, 구체적인 조치를 예고하거나 발표하는 등의 발언을 기대했던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들과 관련 단체들은 대체로 ‘매우 실망스럽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일랜드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이자 아일랜드 엠네스티 국장을 맡고 있는 콤 오골먼(Colm O’Gorman)은 자신의 트위터에 “문제를 제기할 완벽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기를 거부했다”고 비판했다.
역시 아일랜드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이자 교황청 미성년자보호위원회 전 위원인 마리 콜린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에 대해 “실망스럽고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고 짧게 지적했다.
성범죄를 저지른 성직자 명단을 공개하고 고발하는 Bishopaccountability.org 공동대표 앤 바렛 도일은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으나 이를 종식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기로 한 모양”이라고 지적했다.
국제 성직자 성범죄 퇴치 단체 ECA(Ending Clergy Abuse) 역시 ”어떻게 성직자 성범죄를 종식시킬지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교회법을 개정하여 성적으로 아동을 학대한 모든 성직자가 영구적으로 면직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8명의 아일랜드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들과 만났고 이 자리에는 마리 콜린스 전 위원도 참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자리에서 피해자 측으로부터 성직자 성범죄 해결에 대한 조치 관련 질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동 학대 피해자 2명이 만남 직후 발표한 성명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의 부정과 은폐를 ‘인분’(caca)이라고 표현하며 규탄했다”고 밝혔다.
마리 콜린스는 이 자리에서 범죄를 은폐한 주교를 재판할 수 있는 재판부 설치에 대해 “더 나올 것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콜린스 전 위원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미 그러한 재판부가 존재하며 주교들이 석명 의무를 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콜린스 전 위원은 그렇다면 그러한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요청했고, 교황은 콜린스 전 위원에게 ‘좋은 지적’이라고 말했으며 이에 대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콜린스 전 위원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구체적 답변이 없어 “실망스럽다”면서도, “이러한 과정을 따라가며 주교와 관련된 일들이 더욱 투명해진다면 진일보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콜린스 전 위원은 “분명 겉치레는 아니었다”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교황이 이를 경청했기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교황은 성직자 성범죄와 관련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비판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튿날 일정을 이어 갔다.
26일 오전에는 1879년 성모 발현이 있었던 노크 성지(Knock Sanctuary)를 방문하여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노크 성지 연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물지 않은 이 상처는 우리에게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데 있어 공고하고 확신 있는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이 죄들과 하느님의 가족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느꼈을 분노와 배신에 대해 주님의 용서를 청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되신 마리아에게 모든 학대 생존자들을 위한 전구와 이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우리 그리스도 가정의 모든 구성원의 다짐을 공고하게 해주시기를 청한다”고 기도했다.
더블린 피닉스 파크에서 열린 세계가정대회 폐막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시 한 번 성직자 성범죄 생존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교황은 “주님의 자비 앞에 이 범죄를 보이며 이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성범죄를 포함한 모든 학대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교회로서 우리가 모든 학대 피해자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동정과 정의와 진리의 추구를 보여주지 못 했던 시간들에 대한 용서”를 청했다. 또한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을 책임지지 않고 침묵했던 교회 권력층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용서를 청했다.
이와 관련해 ECA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직자 성범죄 퇴치 조치가 ▲성범죄 가해 성직자와 상급자의 공모에 대한 무관용 원칙 ▲신앙교리성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3,400명의 성직자 명단 즉각 공개 ▲성직자의 성범죄 신고 의무화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