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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창조주 하느님을 졸라서 천국땅 한 조각을 얻어왔다’는 이탈리아 사람들
  • 전순란
  • 등록 2018-09-05 10: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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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4일 화요일, 맑음


어젯밤 우리 집사 자훈이가 친척 형을 데리고 왔다. 빗속에 키 큰 총각 하나가 어정쩡 들어왔는데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같이 자라고 컸다니 친형제와 다름없단다. 그런데 그 형이 군대에서 돌아와 대학 4학년이 다 지나고 졸업과 취업이 코앞의 일이 되자 직업전선으로 곧장 달려들기가 두려웠던가 보다. 공주 총각이니 서울에 와서 한 6개월 영어도 배울 겸 도시 생활도 할 겸 숙식이 해결된다면 한번 해 볼 만한 젊은 시절의 또 다른 시도로 자훈이에게 더부살이를 하려나보다.



간밤에 내가 구총각의 열린 방을 들여다보니 아침에 자고난 이불 요가 무정형으로 쌓여 있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주인아짐이 기어이 한 말씀을 했겠다. ‘저게 뭐냐? 자기 주변은 가능한 한 잘 정리되면 좋겠다. 하나가 더 들어와 경쟁적으로 저러고 다니면 우짜꼬?’ ‘저는 달라요. 잘 정리하고 설거지는 엄청 좋아해요.’ ‘푸하하! 여기 설거지를 엄청 좋아한다는 총각이 존재하다니 우리집에 딱이다!’.


경기도에서만 돌고 돌던 우리 아버지의 교장 임지가 서울 가까운 화전으로 와서였다. 가까이 살던 친구네 집들 중에 일찍이 내 평생 집안 정리가 제일 안 되던 친구네가 있었다. 대문 입구에서 안방까지 가려면 발 디딜 자리를 찾아 장애물경기나 지뢰밭놀이, 서바이벌게임을 하듯이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됐었다. 그런데 우리 집도 막상막하였다. 다섯을 키우는 엄마는 여전도회 공무로 늘 바빴다.



우리집에는 방이 셋 있어 엄빠방, 오빠와 호천이가 쓰는 남자방, 두 딸이 쓰는 여자방이었다. 내 친구가 놀러라도 온다면 우리 ‘여자방’만 고양이 세수하듯 빠꿈이 치우곤 했는데 지금도 내가 청결이나 정리에 목숨을 거는 까닭은 어렸을 적의 우리집 지저분한 풍경에 쌓인 나름대로의 열등감의 소치다. 그때 그토록 지저분하던 호천이도 장가가더니만 손가락으로 먼지를 찍어내는 ‘깔끔덩이’로 변신을 했으니 ‘사람은 열 번 변한다’는 속담대로다.


10시까지 종로 공안과에 내 눈을 검사하러 가며 제주에 갈 가방을 챙겨 보스코와 함께 종각역으로 나갔다. 가방 하나엔 우리들이 일주일간 입을 옷가지가 들어있고, 다른 하나에는 아들에게 가져다줄 음식들로 가득 차서 전철로 층계로 건물로 공항으로 끌고 다니는 애아버지 보스코가 불쌍했다.



두 눈이 짝짝이 크기로 사물이 달리 보이던 내 눈은 어느 정도 치료가 되었다고, 한 달간은 약을 더 넣어야 한다고, 눈꺼풀이 내려와 동자를 덮는 증상은 두고서 보자고 한다. 눈에 넣는 약이 어쩌다 입속으로 들어가면 어찌나 쓴지, 모르긴 몰라도 절대 오래 써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종각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곧장 김포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빵고신부를 만나고, 이화씨를 만났다. 보스코와 나는 마일리지로 이화씨와 함께 KAL기를 탔고 가난한 수도자는 값싼 ‘제주항공’을 타고서 떠나 제주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KAL 승무원들을 보며 ‘저 사람들이 이젠 자존감이 들 만큼 조씨네 집안이 사람대접을 해주나?’ 눈여겨보게 되고, 1년 가까운 시간을 사람답게 살겠다고 몸부림치던 직원들 모습이 어딘가에 숨어있어, 인생의 고달픔에 지쳐있는 듯했다.




5시가 다 되어 제주공항에서 빵고와 다시 만나 렌트카를 찾고 금악의 ‘숨비소리’로 왔다. 치통으로 몹시 고생했다는 오신부님은 특단의 조치로 통증을 잠재우고 우리와 함께 대청의 ‘피쩨리아3657’까지 가서 정통 이탈리아 피자를 먹었다. 그리스 산토리니를 흉내 낸 집이고 특히 피자 판이 맛있었는데, 주인 설명이 나폴리에서 직수입한 밀가루가 피자에 특별한 맛을 준단다.




내 음식맛 칭찬에 흥분했는지 피자에 대해 한참을 얘기하던 주인은 이번 금요일 내가 수녀님들에게 피자를 해준다는 말에 밀가루, 생이스트, 반죽강화제 등을 아낌없이 싸준다. 적어도 그 모습은 틀림없이 ‘나폴리에서 직수입한’, 인간미 물씬 풍기는, 사랑스런 이탈리아인 같다. 


어쩌면 그 집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을 졸라서 천국의 일부를 얻어왔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자부심(자연과 문화 그리고 음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과 더불어 그때 이탈리아인들이 함께 얻어온 ‘천사 같은 품성’도 덤으로 얻어온 듯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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