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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어디 가세요?” “니가 그게 왜 궁금한데? 니가 내 마누라야?”
  • 전순란
  • 등록 2018-09-12 10: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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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1일 화요일 맑다가, 흐림


씨앗을 뿌려 놓고 명색이 농부가 10일이나 밭을 떠나 있었으니 농부라고 말하기엔 염치가 없다. 집옆에 논을 둔 구장님만 해도 하루에도 몇 번 씩 올라와 논을 둘러보며 두런두런 작물들과 속 얘기를 한다. ‘넌 우째 그리 넘어 갔노? 누가 밀드나?’ 장화 신고 들어가 바람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며 힘내라고 격려하곤 한다. 저렇게 키운 나락이니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낟알도 아까우리라.


이웃이 다들 그러다 보니 나도 덩달아 아침 일찍 텃밭에 내려갔다. 무, 배추, 아욱, 상추, 열무, 얼가리 내가 뿌린 그대로, 이웃집에 마실도 안 가고 얌전히 자라고 있다. 가지런히 줄 맞춰 서 있는 모습이 얼마나 귀하고 예쁜지! 저런 꼬맹이들이랑 함께 살다 보면, 그래서 농사를 지으면 사람이 저절로 착해진다. 참외 2개를 따고, 가지, 고추, 토마토를 따고, 부추, 호박잎, 신선초를 뜯어 소쿠리 가득 담았다. 장에까지 안 가도 점심장 넉넉히 봤다. 실상 함양 장에 가도 이것 외에 없고, 이보다 더 없고, 이 외에는 필요도 없다.




논두렁을 손보던 유영감님이 간만에 만난 내가 반가웠는지 괭이를 내던지고 다가오셔서 ‘어디를 갔다 왔느냐?’ ‘뭘 했느냐?’ ‘누구를 만났느냐?’ 꼼꼼히 호구조사를 하신다. 20여 년 전 로마 카타콤바에 살 적에 한번은 쟌카를로 신부님이 어딜 나가시기에 우리 식으로 ‘어디 가세요?’라고 물었다가 ‘니가 그게 왜 궁금한데?’라고 하셔서 엄청 면구스러웠던 적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사말이지만 서양에선 시빗거리가 된다. 자칫 ‘니가 내 마누라야?’라는 핀잔도 나온다.



유영감님은 우리집 감동 옆으로 흐르는 개천으로부터 파이프로 당신 논에 물을 대는데 워낙 깔끔한 성격이라 개울을 말끔히 치우곤 하신다. 지난주에는 보스코가 걷어서 그냥 던져놓은 현수막들을 얌전히 접어 한 켠으로 정리하셨다. 우리가 농사짓는답시고 하는 꼴도 우스우셨을 텐데 그래도 칭찬거리를 찾다 오늘은 ‘교수님 맨캉 놀기만 하는 중 알았더니 저쪽 축대 풀도 제법 볐드만, 근데 위 만 뜯어 놨어, 그러카면 금방 커버려 못 쓰는디’ 하신다. 내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워낙 그 사람 반만 해요. 나중에 마저 할려구요.’ ‘허~ 어’ 새벽 댓바람에 이웃집 아낙과 이렇게 말을 섞는 것도 나랑은 그만큼 이무러워서다. 자칫 두 사람 정분났다고 소문난다. 



식당채 뒤꼍으로 이층, 삼층 올라가는 나무 층계가 있다. 그 층계 밑에는 버려진 그릇, 안 먹는 장아찌 병들, 말라버린 된장 고추장들이 가득 쌓여 있다. 늘 치워야겠다 생각만 하다가 오늘은 드디어 손을 썼다. 버릴 건 버리고, 버리는 단지와 병은 깨끗이 씻어 마당 한 구석에 쌓았다. 내 친구들이 간혹 들려주는 말. ‘하도 너절하게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면, 혹시 이러다 내가 덜컥 죽기라도 하면 남들이 얼마나 흉을 볼까 해서 한 트럭은 내다버렸다.’ 대책 없이 쌓아두다 보면 버리는 게 큰일로 남는다.


18년 전 오늘 새로운 ‘삼천년기’를 맞는다고 전 인류가 들떠 있던 첫해 2001년 9월 11일! 뉴욕이 아랍세계 전체의 복수를 담은 빈라덴의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전 인류가 구경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 미국 본토가 처음 공격받은 날이었다. 세 번째로 북한이라는 쬐그만 나라가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을 날릴 수 있다 하여 ‘코피작전’이니 ‘선제공격’이니 한 것도 9·11의 공포에서 였을까? 요즘은 북미회담 운운하며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나날이다.


시우가 학기초 캠프를 다녀온 사진을 받았다. 엄마에게서는 잠시도 떨어지지 못하던 아인데 이젠 새 학년을 맞아 며칠 캠핑도 다녀올 만큼 엄마를 떠나 친구들과 생활도 할 수 있게 되었다니 대견하다. 사실 부모가 걱정을 안 해도 아이가 떠나는 때는 온다, 좀 늦거나 빠를 뿐. 그리고 한번 발걸음을 뗀 아이는 앞만 바라보고 걷고 우리 엄마들은 시선으로 그 뒤를 따라갈 뿐이다. 태어나서 처음 몇 달 한쪽 눈만 떠서 두 할미를 애태우고, 기는 것도 걷는 것도 유난히 느렸던 아이… 대기만성이라니 과연 무엇이 될까 몹시 기대가 된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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