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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임금이 거지에게 손을 내밀다니!’
  • 전순란
  • 등록 2018-09-14 15:12:56
  • 수정 2018-09-14 15: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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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3일 목요일, 비


늦잠을 자던 보스코가 낄낄거리며 잠을 깬다. 어리둥절한 내게 들려준 새벽꿈 얘기가 이른 아침부터 나까지 웃겼다. 우리가 2015년 8월 이탈리아 알프스 발치에서 한 달을 지날 적에 가까운 마을 소르데볼로에서 김원장님과 문선생님이랑 ‘그리스도수난극’을 관람한 일이 있다. 



200년 넘게 그 마을사람들이 총출연하는 연극인데 매 5년마다 상연하고 그 해에는 무려 400여명 주민이 모두 출연하였다(꼬마들은 아기천사나 꼬마 악마로 분장을 했고 갓난아기들까지 엄마 품에 안겨 출연했다). 관람객들로 전세계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와 2500석이 저녁마다 매진됐다.


그런데 보스코가 새벽꿈에 웃은 사연은 따로 있었다. 꿈속에서 저 유명한 그리스도수난극에서 자기가 예수로 분장을 하고 나는 마리아로 분장을 했더란다.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대사를 외칠 순간이었단다. 그것도 빙크로스비풍으로 엄숙하고 비장하게! 


그런데 발가벗고 십자가에 매달린 보스코 예수를 올려다보던 마리아, 아니 유대여자로 분장한 전순란이 킥킥킥 웃으면서 “예수 배 좀 봐라! 저 예수 배 좀 봐!”라고 놀리는 통에 보스코도 뽈록 나온 자기 배를 내려다보며 웃음이 터져 나왔고 수난극은 엉망이 되었단다. 요즘 그가 잠을 자면 ‘푸우, 푸우’ 숨소리를 내서 ‘우리 귀여운 아기곰 푸우’라고 내가 늘상 놀리는데 이젠 대사님 체면도 살릴겸 놀림을 자제해야겠다. 엄숙한 수난극마저 망쳐서는 죄받을 테니까… 



딴 얘기지만, 우리 서울집에 지금 구총각이 오기 바로 전에 박총각이 반년쯤 살았다. 3대 집사 엽이가 함양 고등학교 친구라고 소개를 했는데 연극 연출을 하는, 특이한 캐릭터의 총각이었다. 돈과는 거리가 멀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만 하고도 자족하니 가치관이 우리와 비슷했었다. 한번은 강원도 어느 시골마을에 가서 마을 할머니들 전부가 총출연하는 연극을 지도하여 성공리에 무대에 올렸단다. 우리 함양이나 문정리도 함양 출신 박총각 감독을 모셔다가 저런 멋진 마을공동체의 연극을 해도 좋겠다.


내일 봉재 언니네 가는데 배를 좀 따려는데,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예보가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 혼자 배 밭에 내려갔다. 보스코가 놓친 몇 개를 빼고는 거의가 돌쟁이 주먹만하다. 그 동안 열흘이나 지났는데 왜 더 이상 안 크고 그대로일까? 하기야 보스코가 날 만났던 서른둘 나이에 160cm도 안되던 키가 나이 여든이라고 180cm로 자랐을 리도 없으니…


저 쬐그만 배들을 나무에 마냥 매달아두기도 그렇고, 그걸 과일이랍시고 따지만 일일이 택배로 싸서 지인들에게 보내주려니 보내는 돈이 아깝기도 했는데(택배비로 사먹는 게 나을 듯해서), 오늘 아침기도에서 읽은 복음에 양심이 좀 찔린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것도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었다. 보스코가 즐겨 읽어주는 타골의 시에서 오늘 저녁에 하필 ‘기탄잘리 50’이 나와 복음서와 딱 맞아떨어져 양심이 더 찔렸다.



거지가 구걸을 다닌다. 때마침 임금님 수레가 나타났고, ‘나의 불운도 끝났구나. 청하지 않아도 동냥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자기 앞에서 수레가 멈추었다. 임금님이 빙그레 웃으며 자기한테 다가온다. 그때의 기대와 행복감이라니! 


그런데 임금이 오른손을 내밀며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 것이 있는가?’ 한다. 임금이 거지에게 손을 내밀다니! 거지는 어리둥절하여 동냥자루에 손을 넣어 곡식 낟알 한 개를 꺼내 바쳤다. 타골의 시는 이렇게 반전된다. 


“그러나 날이 다 가고 마루바닥에 내 자루를 쏟아 

초라한 곡식 몇 줌 속에서 황금의 작은 낟알을 하나 보았을 때, 

내 놀람은 얼마나 컸던고! 

나는 애타게 울며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임께 드릴 것을!’ 하고 장탄식했더이다.” (타골, 기탄잘리 50)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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