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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농부야말로 창조주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 전순란
  • 등록 2018-09-17 11:05:42
  • 수정 2018-09-17 11: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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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6일 일요일, 맑다 흐림



한 달에 한번 함양본당 주임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주시는 날. 미사가 거행되면 맨날 ‘공소예절’이란 꽁보리밥만 먹다 괴기와 생선으로 잘 차려진 밥상에서 하얀 쌀밥을 먹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저녁에 오실 본당신부님 대신 마산교구 가톨릭농민회 지도 겸 농어촌사목 담당 강형섭 신부님이 아침 일곱 시에 합천에서부터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신부님의 강론은 “농부만큼 하느님 창조 사업에 동업자로 일하는 사람이 없다. 땀 흘려 땅을 일구고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하느님이 만드신 생명을 열심히 살아가고 살려내는 농부야말로 창조주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라고 귀농 귀촌한 공소신자들을 추어주셨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바라신다. 우리가 낳은 애들이 그렇게 살기를 부모가 원하는 것처럼… 우리보다 사랑이 더 크신 하느님이시니 그분 품안에 걱정근심을 다 내려놓는 게 우리 본분 아닐까?”


농민회 지도신부님답게 공소신자 모두 농부인 우리를 으쓱하게 만드신다. 어제 저녁 산보 길에 보스코와 꺾어온 무릇과 꽃무릇, 개망초가 주님의 제단 앞에서 뽐내며 수줍은 웃음을 짓듯이… 꽃들은 비록 우리 손에 꺾이더라도 제단에 꽂혀 창조주를 찬미하는 게 으쓱할 게다.


진이네가 어제 저녁에야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하리라 여겨 미사드려 주신 강신부님과 진이네가 우리 식당에서 함께 아침을 들었다. 강신부님은 합천의 어느 공소에서 살며 교구 농어촌 공소들을 모조리 담당하신다는데 미사 집전이 필요한 공소는 어디든 다 찾아가시나보다. 감기가 심한 몸으로 한 시간 걸리는 먼 길을 달려와 주셔서 참 고마웠다.



여러 날 비 오고 흐리다 간만에 왕산 위로 푸른 하늘과 새털구름이 떠올라 반갑다. 무와 배추는 뿌리를 내려 부지런히 자라는 중이고 쪽파도 파란 잎을 솔잎처럼 올렸으니 이젠 비님이 쉬엄쉬엄 찾아오셔도 좋겠다.


비가 오니 호박벌의 나들이가 불편해졌는지 애호박이 통 안 열린다. 드물댁이 어제 가져다 준 호박도 갈라보니 벌레가 가득했다. 아직 꽃을 머리에 달고 있는 어린호박 때 벌이 침을 놓고 그 속에 알을 슬어놓으면 호박속을 파먹으면서 알은 애벌레가 되어 무럭무럭 자라나 호박이 늙을 때쯤 성충이 된다. 호박을 반으로 갈랐을 때 아낙들을 깜짝 놀래케 하시는 하느님! 우리 텃밭에서도 예닐곱 통이 커가는 중인데 ‘열 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듯이 ‘사람 속은 알아도 호박 속은 모르겠다’는 속담이 나옴직하다. 물론 그렇게 벌레를 키우시는 ‘하느님 속’은 더 모르겠고…


살레시오 전 관구장 남신부님의 부친이 돌아가셔서 내일 서울 구로3동에서 치러지는 장례미사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우리가 서울에 머물 때 돌아가셨더라면…’ 하는 말이 입 밖에 나오려고 하지만, 보스코 말마따나, 하느님께서 사람의 태어남과 떠남, 삶과 죽음은 우리의 동의 여부를 묻지 않으시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편의나 유불리를 봐주지 않고 당신이 알아서 하신다. 내 친구 말남씨도 먼 길을 떠나며 나를 시골에서 한 번 더 서울로 불러올렸다.


오늘이 ‘함양산삼축제’ 마지막 날이고 꽃무릇도 상림에 만발하여 서울로 떠나기 전 축제마당을 한 번 더 둘러보기로 나섰다. 연수씨네 ‘강소농식당’을 보니 손님도 많고 일손도 바빠 내 마음이 뿌듯했다. ‘만석지기’ 매장에서 안나마리아를 만나보고, 굼벵이와 산삼으로 환을 만들어 파는 기숙씨도 만났다. 미자씨네서 커피한잔을 하고 있는데 혜진씨가 자기랑 딱 닮은 두 딸을 데리고 지나간다. 문정마을 갑장도 만나고 ‘달과 별’ 펜션의 여주인도 만났다.



함양군 전체 인구가 4만이 미처 못되니 이런 축제에 나오면 만나야 할 사람은 다 만나게 된다. 꽃무릇을 감상하러 상림을 다 돌고나서, 이번 축제를 총괄하느라 얼굴이 까맣게 탄 축제준비위원장 하소장님을 만났다. 당신 속은 까맣게 타지 않았는지 ‘분위기 있는’ 찻집으로 우릴 데려가 다도(茶道)를 하는 함양 숙녀들의 손으로 차대접을 해주었다. 때마침 그곳 팽주로 봉사 나온 사랑스런 아우님 정옥씨도 만났다. 정옥씨 외아들 엽이네가 다음 달 아기를 낳기 전 친정이 사는 의정부로 이사를 간다니 친정이 시집보다 가까운 요즘 풍토로 보아 어쩌면 우리나라가 이미 ‘모계사회’로 진입한 듯하다.


2시 반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6시! 2호선 지하철로 성수역까지, 성수에서 신설동까지, 그리고 신설동에서 우이솔밭까지 또 한 시간! 집에 들어오니 구총각이 우릴 맞아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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