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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민족과 국토를 사랑하는 이들이 오래오래 간직할 이 사흘
  • 전순란
  • 등록 2018-09-21 14:12:46
  • 수정 2018-09-21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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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20일, 목요일 비


한 6개월치 티비를 한꺼번에 본 듯하다. 거의 안 보다가(하루 중 유일하게 저녁 8시, < jtbc 뉴스룸 >이 시청시간이다) 계속해서 티비를 보니 멀미가 날 것 같지만, 코피 터지면서도 노는 아이들처럼 눈을 화면에서 뗄 수가 없다. 방송한 것 보고 또 보고, 한 말 듣고 또 듣고, 다음에 무슨 말 무슨 가사가 나오는지 가수의 표정 몸짓까지 기억하는, 아이돌을 대하는 아이들처럼 들떠 있었다. 내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보스코에게 내가 괜히 찔려 한마디 한다. ‘여보, 나 병 들었나봐!’ 그도 씨익 웃는다.



사람들은 극명하게 갈라진다. 나 같이 ‘재인이-메르스’에 걸리거나, 조선일보 기사에 나올 법한 말처럼, 백두산 장군봉에서 두 손을 마주 쥔 두 정상의 사진을 보고서 ‘가슴이 섬뜩한 사람’이거나. 그런 말을 들으면 한반도의 운명이 좌우되는 이 긴박한 시기에 저따위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더 섬뜩하다.


지리산에는 어제부터 별 필요도 없는 가을비가 내리는데 저 비구름이 한반도를 오르내린다면 오늘은 평양이나, 삼지연 공항이나, 백두산에서 기웃거리지 못하게 지리산 허리에 잡아둬야겠다.


과연 내 덕분인지 백두산은 안개만 조금 끼어 있었고, 천지는 10년 전(오늘보다 사흘 늦은 9월 23일이었다!) 우리가 올라갔던 날처럼 검푸른 빛깔의 위용으로 드러났다.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사람, 마음이 바르고 깨끗한 사람 사람에게만 자태를 열어 보이겠다는 듯이, 아니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문 대통령 일행에게 모습을 열어주었다. 사흘간의 이 감격을 민족과 국토를 사랑하는 이들은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오늘은 느티나무독서회가 모이는 날이다. 책을 한꺼번에 사서 마구 읽다 보니 예전에 읽은 책을 오늘 발표하는 셈이 되었다. 오늘 책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책을 읽을 때는 줄을 쳐가며 나름 열심히 읽는데, 이젠 몇 주만 지나면 줄거리조차 가물거리고 감상을 얘기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늘 새로워서 좋겠다?’ 사실은 암담하다. 그래도 희망이 남아있다면, 책을 열면 다시 솔솔 생각이 풀린다는 점.


마당의 금목서가 자잘하지만 향기높은 꽃을 피웠다. 나무를 캐다 심어준 율리아노씨…


한 소년의 일탈. 육체관계로부터 눈뜬, 사랑인 줄도 모르는 사랑. 거기에서 한 소년이 평생 한 소녀를 사랑하고 자라서 안정된 가정생활을 이룰 ‘평범한 삶’은 사라진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여인이 자기가 문맹이라는 수치심을 숨기기 위해 만사를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정체가 노출되는 대신 나치의 도구가 되고, 법정에서는 어처구니없이 범죄를 자백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감추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운다.


지금은 나치 전범인 한참 연상의 여인을 한때는 사랑했던 소년은 법대 가서 변호사가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한 생을 시작하려 하지만, 소년 시절의 사랑에서 온 상처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야 할 나이에도 회복되지 않는다. 한때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이 18년 만에 형무소에서 나온다고 할 때, 법조인인 남자로서는 나치에 부역하고 거기에 대한 죄의식도 없는,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그니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 남자에게 걸었던 유일한 사랑이 거절당하자, 거절당한 사랑 앞에 차디찬 시체로 누운 여인! 


우리 주변에서 악이란 특별한 모습이 아닌,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생각 없이 저질러진다. 이명박근혜 집권하에서 사회악을 저지르고 지금 재판을 받는 저 모든 피고인들(합쳐서 52명이란다)의 얼굴에서도 ‘악의 평범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가짜 뉴스와 왜곡된 보도와 꾸준한 편견으로 시청자와 독자들을 ‘평범하면서도 신념 있는 악인’으로 화석(化石) 시키면서 보수언론들, 그자들이 저지르는 ‘악의 일상성’을 보노라면 저주를 퍼붓고 싶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열렬하게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 아우들은 이 작은 함양 사회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함께 읽은 책에서 자기 느낀 바를 함께 얘기하고,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생각이 자란다. 이전의 편견과 주장이 개선될 여지가 있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그렇게 소중한 모임을 갖고서 주부로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그니들의 모습은 한 달마다 훌쩍 자라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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