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4일 목요일, 맑음
어제 너무 많이 걸어 몸을 혹사하여 이튿날의 원만한 기상을 위해 아예 진통제를 먹고 잤다. 그래도 온몸이 쑤셔 밤새 잠이 안 오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잘 놀려면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어제 걸으며 연신 엄살을 하던 보스코가 나보다 더 멀쩡하다. 일어서서 걸으려는데 발이 안 떼어진다. 어제 새 신을 신고 걸어 발에 서너 군데 물집이 잡혔다. 두 발도 주인 잘못만나 고생께나 한다.
그래도 정신은 멀쩡해 서울대병원 가까운 창경궁에 가는 길이라 저서의 집필 마무리에 고생 중인 문섐을 만나 위문을 해야겠다싶어 점심에 함께 하자고 카톡을 보냈다. 어제 밤 11시가 넘어 김밥 싸겠다고 김 사러 나간 이엘리의 정성을 봐서라도, 귀한 분 한 사람쯤은 더 모셔야 할 것 같아서다.
오늘은 ‘우이4인방 5대 고궁순례 둘째 날!’ 창경궁을 방문키로 했다. 외할머니 댁이 가회동이어서 이모와 함께 걸어 옛날엔 창경원 동물원에 자주도 갔고, 연못에서는 발로 젓는 백조를 타고 좋아 했었다. 그 뒤로 벚꽃 피는 봄날 대학 친구들과 밤 벚꽃 놀이로 한두 번 오고…
이대 다니던 막내이모는 (지금은 폭삭 늙었지만) 멋진 청년과 연애 중이었고 나를 함께 딸려 보내시면서 외할머니는 안심하고 데이트를 허락하셨다. 그때는 젊은 남녀의 뽀뽀는 물론, 손을 잡는 망측한 일도 별로 없었건만,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남녀가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나름대로 마음을 썼다. 두 분은 영악스럽게 둘 사이에 낀 기집애가 얼마나 미웠을까!
오늘 창경궁을 다니며 들었던 옛날 그 궁궐 안에서 벌어진 역사, 특히 근대 일제의 만행이 우리 문화를 어떻게 파괴했으며 궁궐을 헐어낸 자리에 동물원을 지어 우리의 역사를 희화화한 사실이 일본 제국의 잔학성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준다. 머지않아 그 침략의 상징 ‘욱일기’를 기어이 달고 우리 땅에 들어오겠다는 그 뻔뻔함이라니! 독일 군대가 나치의 깃발을 달고 이스라엘에 들어가 행진을 하겠다는 것인데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 있을까? 세계 어디를 가나 궁중 역사는 슬픈데 창경궁에 엉킨 역사들은 더 서글프다.
하지만 궁궐의 지붕 위로 펼쳐지는 푸르른 가을 하늘이며 춘당지 옆에 백송은 참 아름다웠다. 우리의 현실이 어쩌면 저 슬픔을 모두 딛고 일어선 결과이거니 하고 우리 넷은 묵묵히 경내를 걸으며 많은 생각을 가슴에 담았다. 다음 달엔 남산엘 가기로 했다.
마로니에 공원이 싸간 음식을 먹기엔 미흡하다하여 차 세우기도 편리한 혜화성당에서 문섐을 만났다. 그 성당 친교실에 들어가 넷이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펼치니 한상 가득! 특히 이엘리는 아이스박스 가득 음식을 장만해 왔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고도 남았다. 문선생님은 책의 마지막 부분을 손질하는 중이어서 많이 지쳤을 텐데도 밝은 얼굴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어딜 가나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만나고 나눌 수 있기에 인생은 살 만하다.
보스코는 오후에 마포에 있는 ‘가톨릭프레스’에 가서 그곳 스튜디오에서 신성국 신부님(KAL기 추락진상과 김현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수십년 투쟁해온 분)과 대담을 하고 돌아왔다. 한반도 사태에 관한 교황청의 관심과 긍정적 개입을 얘기했을 게다. 그곳에서의 공직생활 때는 물론 지난 10년간 교황청의 국제적 위상과 영향력을 한반도에 반영시키려고 로마를 몇 차례나 오갔는지 모른다.
저녁 식사 후 오빠가 다녀갔다. 성서방 주라고 홍삼즙과 국수 엑기스를 가져 왔는데 오빠가 많이 지쳐 보여 염려스럽다. 우리 가난한 인생에서는 오누이라도 서로에게 해줄 일이 별로 많지 않다.
우리 집 세 번째 집사 엽이가 오늘 아들을 낳았다고 정옥씨가 아기 사진을 보내왔다. 우리 집사들을 찾아 세상에 온 다섯 번째 아기인데 딸이 하나도 없어 서운하다. 할머니가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괜히 웃음이 벙글벙글 나는 게 이제는 손주 자랑하는 할머니의 반열에 자기도 든 것 같단다. 미연씨 수고했어요! 꼬마야 잘 자라라! 세 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