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지혜 7,7-11) 해설
<지혜에 비하면 재물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혜 6-9를 한번 보면 오늘 독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솔로몬의 말이 길게 나오고, 마지막에는 기다란 기도로 끝맺는다(9장). 솔로몬 왕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이 그의 간청에 따라 지혜를 선물로 내려주셨다. 솔로몬은 그 지혜를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여겼고, 그 지혜가 자기에게 모든 좋은 것을 마련해 주었음을 숨기지 않는다(7,8-14).
지혜는 하느님의 아름다우심과 능력이 피조물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에(7,25-8,1), 많은 사람들과 왕들이 지혜를 얻으려고 갈망했고, 그 지혜의 권고를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는 어려운 임무를 다하려 노력했다.
오늘 독서를 읽는 신자는 누구나 지혜서를 쓴 저자가 말하는 지혜는 과연 무엇인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지혜서의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들은 이방인들 사이에 분산되어 살면서 그리스 개념들에 영향을 받은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지혜’는 영적 피조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누어 주고 당신과 친교를 맺게 해주시는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지혜를 받아야만 인간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하느님의 불사불멸성에 참여하게 된다(1,1-15; 2,23). 지혜는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영혼 안으로 들어가고, 지혜는 그런 사람을 하느님께 사랑스러운 자로 만들어 준다(9,10-12). 지혜는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영원한 생명에까지 이르게 한다(6,9-21).
이렇게 되면 우리는 벌써 신약의 문턱에 가까이 다다른 셈이다. 바오로와 요한은 하느님이 믿는 자들 마음속으로 보내 주시는 성령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그와 똑같은 형식을 사용한다. 하느님도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당신 눈과 마음에 들게끔 만들고 온갖 덕행을 실천하도록 하신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이 같은 특별한 선물과 초대를 받은 인간은 절로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구약의 다른 부분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도는 항상 지금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과 장차 구원해 주실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와 탄원이다.
시편(89) 해설
<주님,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오늘 시편 전체가 깨지기 쉬운 인간의 나약함과 국가가 겪고 있는 곤경을 일깨우고 있다. 인간은 항상 자기의 약함과 잘못과 오류를 자인하면서 지혜를 간구해야 할 입장에 있다.
오늘 시편 구절들은 하느님께 집요하게 이해와 동정을 간청하고, 지난 세월 견뎌온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 주시라고 간청한다(15절). 하느님께 바라는 믿음과 희망은 비참한 인생살이 한가운데서도 우리를 비추어 주고 부축해 주고 위로해 준다.
제2독서(히브 4,12-13) 해설
<하느님의 말씀은 예리한 칼처럼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지금 읽은 두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지닌 몇몇 측면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 독서의 문맥은 단순하다. 저자는 4,4에서 출발하여 창조 마지막에 하느님이 시작해 놓으신 ‘안식’에 관하여 계속 언급하고 있다.
복된 땅을 정복했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안식’에 결정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다윗도 시편 95에서 잘못하면 누구나 그 ‘안식’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하느님 백성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고, 하느님의 표양에 따라(창세 2,2) 온갖 수고스런 일을 영원히 마치고 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을진대, 그 누가 자신하고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갈 일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효력을 발휘하여 그 의도한 바를 성취한다고 믿었다(참조. 이사 55,11). 그런 확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언자들은 그 확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온갖 투쟁과 희생을 감수했다(참조. 예레 20,7; 에제 3,26이하).
그런 확신은 예수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과 어찌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셨던지, 당신의 모든 행동과 당신 자신까지도 하느님의 말씀과 동일시하셨다.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신다(히브 1,1이하).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처럼 살기로 작정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모든 은밀한 지향과 행동을 지시하고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리한 쌍날칼처럼(참조. 묵시 1,16), 생동하는 말씀으로서 생명을 주고 샘이 되고 창조하는 능력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들의 행동을 외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판단한다.
복음(마르 10,17-30) 해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에 ‘유다인들의 법률과 새로운 법률’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단식이나 정결례 같은 이러저러한 특별한 전통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의 율법 전체를 가지고 말씀하신다.
유다인들은 흔히 십계명을 자기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직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주장하신다.
마르코 복음서는 마태 5,17-48에 전개된 내용과 동일한 노선을 따르고 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래서 부유한 젊은이에게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21절)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내는 의로움(올바름)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충분치 못했다. 가난하신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가 절대적이다(25-31절).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겸허해진 어린이처럼 순진해질 필요가 절대적이다(10,13-16).
예수님께서 재산을 가진 사람들,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은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 것인가? 청빈서원을 하고 완덕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인가. 아니다. 그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말씀이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인류 대부분 앞에서 ‘더 많이 소유하기와 더 많이 으스대기와 더 세도부리기와 더 많이 소비하고 더 향락누리기’가 인생목표인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앞에서 철저하게 가난한(무소유, 무자격) 사람들이 차지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한 불의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인간 스스로의 안목이나 힘으로는 실현이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
묵상
인간을 풍요롭게 해 주는, 가난하라는 부르심
성경에서 소명에 대하여 말할 때, 그 소명은 항상 원천적인 소명이고, 생명으로의 부르심이다. 그 외 어떠한 소명도 인간을 살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근본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그런 소명을 받을 때,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인간에게 도달되는가? 항상 새롭게 그리고 더욱 충만하게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목소리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우리 열망이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열어 주는 지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혜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존재와 실존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준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고, 우리 가운데 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죄악에 파묻힌 우리 생명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여 들어 높여졌다. 예수님의 생애와 생활목표와 생활방식을 따르고 본받고 재현하는 것이 우리 소명이 되었다.
하느님의 목소리, 참된 생명의 목소리를 우리는 이제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안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이 인간으로 되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우리 일상적인 지상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실 수 있게 되셨음을 뜻한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내적 투쟁을 일으킨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되신 말씀과 그분의 복음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법률’은 인간 마음속에 줄곧 창조적인 자극을 주고 있다. 조건 없이 무한정 헌신하라는 것이 그분의 ‘새로운 법률’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 계명은 인간 누구나가 받은 소명이기도 하다.
예수처럼 인간을 사랑하려면, 예수처럼 철저하게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가난을 정신적인 가난과 물질적인 가난으로 이원화시켜서는 안 된다. 물질적으로 부자이고 많이 소유하고 누리면서 동시에 정신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한편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하지 못하고 욕구불만과 탐욕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있다. 날마다 수만 명씩 순전히 굶어 죽어가는 세계 속에서 정신적인 가난은 필수적으로 물질적인 자발적 가난을 동반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부자이면서 정신적으로 가난하다고 자처하는 것은 기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하여 일생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가난하게 살고 마침내는 벌거벗은 알몸인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십계명을 착실히 지켜는 데 그치지 말고 당신의 철저한 가난과 섬김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고, 오로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구원과 멸망을 앞에 둔 인간의 운명이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내고 편안히 쉬는 사람이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그 수고에 합당한 대가를 빼앗기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처한 참상을 나 몰라라 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노라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안락한 생활과 만족할 만한 지위와 명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다. 십자가의 가난과 치욕과 고통을 실제로 겪고 있지 않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생각으로 가난한 사람과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미 넉넉한데도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서, 부유한 나라인 자기 나라가 더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그래도 자기는 정신적으로는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생각으로만 가난한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마땅한 잠자리도 없이 떠돌던 예수처럼 고단한 입장에서도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인정하고 재물 모으고 출세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함께 사는 따뜻한 사회와 세계를 건설하는 일을 인생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닐까?
연중 제28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지혜 7,7-11)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시편(89)
<주님,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제2독서(히브 4,12-13)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형제 여러분,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마르 10,17-30)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