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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반드시 사회 안에서 실천된다
  • 김수복
  • 등록 2018-09-14 16:13:05
  • 수정 2018-09-14 17: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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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1월 17일 박근혜 정권 당시 천주교광주대교구는 시국미사 봉헌 후 거리를 행진했다.


제1독서(이사 50,5-9ㄴ) 해설

<내 몸을 박해자들에게 내주었노라>


이사 50,4-9는 ‘주님의 종’이 부른 셋째 노래로서, 그 문학 유형은 자기 처지를 탄식하면서도 주님께 신뢰를 기울이는 개인 시편을 연상케 한다.


구약성경에는 개인적 탄식과 탄원 외에도,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중개자’가 원수들에게서 받는 박해와 난관 앞에서 주님께 탄원을 드리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전형적인 예는 예레미야의 경우로서, 박해받는 예언자의 모습이 ‘주님의 종’을 미리 보여 준다. 


하느님으로부터 임무를 받고 파견된 ‘중개자’의 구실이 4절에 나와 있다. ‘중개자’는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 말씀을 전하여 고달픈 사람들을 격려한다.


‘주님의 종’은 예레미야처럼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실한다(참조. 예레 15,16-19; 17,15-16; 18,18-20; 20,8-9). 충실한 ‘주님의 종’은 반대와 박해를 당해도(5ㄴ-7절) 정의로운 하느님만을 굳게 믿는다(8-9절). 예레미야처럼 주님의 종도 자기의 결백과 무죄를 똑똑히 의식하고 있으며, 주께서 반드시 자기 무죄를 밝혀 주시리라 확신한다(8-9절을 예레 11,19; 12,3 15,10-16등과 비교해 보라).


그리스도인들도 고달픈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어떠한 박해와 수모를 당할지라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꿋꿋하게 민족 전체와 인류 전체가 함께 어우러져 합심하여 살게 하는 바른 말, ‘하느님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전달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다.


시편(114) 해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산 이들의 땅에서>


병고에 시달리고 죽음을 목전에 둔 시편 작가가 큰 신뢰심으로 주님께 “주님, 제 목숨을 살려 주소서”라고 탄원한다. “의롭고 다정하고 인자하신” 주께서는 그 탄원을 들어주신다.


하느님은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찬미가를 부른다.


인간을 불의와 박해와 죽음에서 근본적으로 구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주님뿐이시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참된 도움을 줄 수 있다.


제2독서(야고 2,14-18) 해설

<실천이 따르지 않은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오늘 독서, 특히 24절은 “오직 신앙으로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다”는 바오로의 교리와 배치되는 주장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저자는, 유다인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 예언자들과 현자들처럼 종교와 윤리를 직접 결부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참된 신앙은 단순한 수긍이 아니다(마귀들도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다!). 바오로가 말하는 신앙 개념은 인생을 영위하는 생활원리이고 필연적으로 윤리를 동반하는 신앙이다(갈라 3,2; 5,7).


더구나 바오로는 근본적 이원론과는 거리가 멀다. 바오로에게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황금률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자유다(참조. 갈라 5,13-14; 로마 8,4; 13,8-10).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저자와 바오로와의 차이는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일 뿐, 내용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즉,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원칙을 ‘살아 있는 신앙’이라 했고, 야고보서의 저자는 ‘신앙과 그 실천’이라 한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는 복잡하고 알아듣기 힘든 이론이나 학설 따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인간들끼리 맺어야 할 관계를 설명하실 적에도 결코 이론적인 학설을 늘어놓지 않고,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 모습을 들어 어부 같은 못 배운 사람도 감동 깊게 알아들을 수 있게끔 설명하셨다.


진리는 결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고 모든 인간들은 똑같은 한 형제이다”는 진리가 어떻게 어려운 이론인가. 다만 역사와 현실 안에서 그 진리를 말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헐벗고 배고픈 수많은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여기지 않는 마음이 문제다. 왜 그들이 그런 처지에 빠져 있는가를 정의(하느님의 뜻)에 따라 밝히는 것이 문제다. 개인이든 국가든 불의하고 부당한 구조와 체제의 혜택을 받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고스란히 반환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그 같이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겨야 행동하는 믿음이 될 것이다.  


복음(마르 8,27-35) 해설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통을 받으리라>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서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대목이다.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나오는 대목이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정체는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마귀들만이 그 사실을 누설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1,21-28; 3,11-12; 5,6-7). 예수님께서 과연 누구시라는 참된 정체에 대한 고백은 예수님의 행적과 기적을 낱낱이 목격하고 직접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밝혀야 할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 제자들마저도 먼저 은총을 받고 치유를 받아야만 그런 엄청난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받고, 신앙고백을 할 능력을 받고, 예수님의 신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연후라야 그들은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27-28절),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었다(29절). 은총으로 계시되는 신비에 대한 응답인 신앙고백은 그 신비를 깨닫도록 허용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그런 제자들마저도 예수님께서 당신이 수난과 죽음을 당하게 되리라고 선언하시자, 그 말씀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한다. 제자단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예수를 만류하고 나설 정도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도 과연 그분이 메시아(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인류구원 사업을 계속할 적에도 재물과 권세를 확보해 간다거나 부자들·권세가들·부유한 나라들을 등에 업어서는 오히려 그 사업을 방해하고 파괴할 뿐이다. 그리스도처럼 인류 안에 나눔의 정의와 해방과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을 당해야만 그 사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묵상


실천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고 거짓 신앙이다.

 

우리는 절대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 믿음에 상응한 삶을 살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속인 셈이 된다. “나는 무엇이 올바른지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치 못하다. 내 자신이 올바른 길을 따라 살고 있는가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인생목표와 생활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했는가가 중요하다. 인간을 대하는 나의 구체적인 마음자세와 태도, 내 자신과 내 혈육과 내 친구와 내 국민과 다른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위하는 내 마음씨와 구체적인 행동이 중요하다.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야고보서의 저자가 한 말은 유효하다. 세계 도처에서 굶주리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어 가는 무수한 인간들을 눈앞에 두고 입으로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야고 2,16)


‘별들의 전쟁’ 기획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전쟁준비금으로 연간 수천억 달러씩 소비할 돈은 있어도, 세계 곳곳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무수한 사람들에게는 동냥하듯 시늉으로 던져 주는 구호물자와 돈 몇 푼으로 손 씻고, 불평등하고 불의한 교역으로 말미암아 빚더미에 올라서서 허우적거리는 빈곤국들에게는 의타심을 갖지 말고 국민성을 개조시킨다든지 해서 스스로 잘 살아보라고 타이르는 정도에 그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려면 부유한 나라들이 자기네 발전에 앞서 굶어 죽는 무수한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고 말 그대로 인류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른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그에 앞서 빈곤국 국민들이 스스로 깨어 일어나 지상의 모든 재화가 하느님의 소유임을 똑똑히 명심하고서 그 믿음으로 서로 결속해서 인류의 화해와 일치에 앞장설 일이다. 


신앙은 반드시 사회 안에서 실천된다.


신앙실천은 개인적인 신심단련이나 수련의 차원에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가정·직장·단체·국가·세계 속에서 인간관계·사회관계와 온갖 이념·체제·구조·제도·관습·법률을 더 정의롭고 더 참되고 더 사랑에 넘치도록 바꾸어나가려는 노력과 투신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참된 신앙인은 고통 받고 굶주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많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코 평온하게 지낼 수 없다. 참된 신앙인은 사회 안에 꿈틀거리는 온갖 미움·온갖 불의와 용감하게 대적하여 투쟁을 펼치게 되어 있다. 참된 신앙인은 구조악에 희생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조금씩 동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러한 희생자들을 낳고 있는 구조악 자체를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사회와 세계의 불의와 구조악을 밝혀내서 뿌리 뽑기로 투신해야만 신앙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공동체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다.




연중 제24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50,5-9ㄴ)

<내 몸을 박해자들에게 내주었노라>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시편(114)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산 이들의 땅에서


제2독서(야고 2,14-18)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복음(마르 8,27-3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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