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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나눔-김혜경] ‘나’는 허구인가? 실체인가?
  • 김혜경
  • 등록 2018-10-16 16:18:30
  • 수정 2018-10-16 16: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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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wel Kuczynski


“구글, 문자 보내줘~, 구글, 알람 맞춰줘~” 이러다 곧 스마트폰에서 자판이 쓸모없어 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아예 글자 자체를 잃지는 않을까? 그런데 갑자기 인터넷이 끊기면? 스마트폰이 고장이라도 나면? 친구에게 연락도 못하고 학교나 회사에 지각하고 그러려나? 섣부른 생각이겠지?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실재인양 믿고 함께 공유하는 능력으로 지구촌을 점령했다고 했다. 20세기의 글로벌 엘리트들 역시 파시즘과 공산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과거를 죄다 설명하고 전 세계의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이미 무너졌고 우리 곁에는 자유주의만 초췌해진 얼굴로 남아 있다. 


자유의 힘과 가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는 정치와 경제 체제를 계속 자유화하고 세계화하기만 하면 지구촌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고 자유주의이야기가 만능이 아님을 깨달으면서, 영국의 브렉시트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처럼 국가 간 장벽과 방화벽이 다시 세워지고 있다. 저자는 자유와 평등, 세계화를 외치던 국가들이 점차 민족주의로 돌아서고 있음을 염려한다. 핵전쟁과 심각한 기후변화, 생태위기, 디지털 독재에 대처하려면 새로운 지구적 정체성과 윤리지침을 세우기 위해 더욱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p.189)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 지금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근거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는 증기기관과 정유공장, 텔레비전 등 산업시대에 맞춤한 체제다. 요즘처럼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에서 일어나는 혁명적인 변화에는 올바른 처방을 내리지 못한다. 머지않아 사람의 몸과 정신까지 임의로 재구성해 귀찮은 파리 죽이듯 쓸데없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게 하거나 인위적으로 뇌를 설계하고 생명을 만들어 삶을 연장하기도 할 거다.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그런데 이를 설명해줄 그럴듯한 스토리가 아직 우리에겐 없다.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자유의지’를 가진 권위 있는 존재라 여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정말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로운지, 내 안에 자유의지라는 게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다. 게다가 인간에 대한 자유주의식 믿음도 사실 그리 오래된 게 아니다. 수천 년 동안 권위는 신에게 있는 거라 믿었고 자유의지 역시 신의 덕목이었다. 그런데 기껏 몇 세기 누려온 이 ‘권위’조차 조만간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예컨대 정보와 생명의 놀라운 기술 변화로 사람들은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누리게 될 테지만, 그 때문에 사람은 평생 환자신세로 전락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 몸 어딘가는 늘 어떤 문제가 있으니 말이다. 점점 알고리즘에 많이 의존하게 되면서 의견이나 감정까지 컨트롤 당하면서도 더 편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알고리즘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 테니까.


유발 하라리는 알고리즘이 앗아갈 일자리 때문에 벌어질 대량실업보다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이동하면서 생겨날지 모를 ‘디지털 독재’를 훨씬 더 걱정한다. 인간은 어떤 문제에 대해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칠 때가 훨씬 많은데, 이미 감정은 뇌 속에 있는 수많은 뉴런들의 생화학적 현상임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멀지않은 미래에 내 감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봇(bot)들이 내 깊은 두려움과 갈망 같은 것들을 정확히 파악해서는 그걸 이용해 나에게 뭔가를 하게 할 수도, 하지 않게 할 수도 있을 거란다.


▲ 영화 <인사이드 아웃> 스틸컷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바로 주인공 라일리의 뇌 속을 탐험하는 <인사이드 아웃>이다.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등으로 귀엽게 의인화된 생화학적 기제들이 본부(뇌 속)에서 라일리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부지런히 버튼을 누르고 레버를 올리고 내린다. 그에 따라 좋거나 나쁜 모든 기분과 어떤 행동을 할지, 뭘 선택할지가 결정된다. 그곳 어디에도 영혼이라든가 진정한 자아, 자유의지 같은 건 없다. 라일리가 느끼는 행복이나 우울 같은 여러 감정들은 서로 다른 수많은 생화학적 기제들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이건 알고리즘이 기쁨이와 슬픔이, 버럭이의 버튼과 레버를 조작해서 뇌와 감정을 공학적으로 개조하면, 라일리를 알고리즘이 원하는 캐릭터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알고 보면 섬뜩한 블랙코믹물이다.


도대체 이런 식이면 2050년쯤의 세상은 어떻게 될까? 초지능 기계와 공학적으로 설계된 신체, 소름끼칠 만큼 정확히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알고리즘, 그때그때 신속하게 조절되는 인공 기후 등등. 너무나 빠른 사회변화에 어쩌면 십년마다 직업을 바꿔야 할지(p.398)도 모른단다. 이제 어쩐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이 상황에 나는 뭘 해야 할까? 


하라리는 강한 ‘정신적 탄력성’과 풍부한 ‘감정적 균형감’이 필요할거라 진단한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사방에서 지켜보며 나를 해킹하는 시대라면서 어떤 게 내 목소리이고 어떤 게시장의 전문가가 주입한 내용인지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단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게 뭔지를 잘 알아야 한다 말한다. 나의 존재와 나의 미래를 알고리즘이나 아마존, 정부가 아니라 내 자신이 컨트롤하고 싶다면 말이다. 


방법은 오직 ‘나’만이, 나의 자유로운 선택과 나 자신의 느낌을 통해서, 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몹시 어려운 일이다. ‘나’라는 존재는 <인사이드 아웃>에서 보듯 내 밖의 세계는 물론이고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조차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욕망, 심지어는 욕망에 대한 반응까지도 내가 조절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라리는 역설적으로,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으면 오히려 내 감정이나 욕망에 덜 사로잡힐 수 있고 자유의지라는 폭정에서도 좀 더 놓여날 수 있을 거란다. ‘자아’야말로 정신의 복잡한 매커니즘이 끊임없이 지어내고 업데이트해 재구성하는 허구이니 말이다. 어떻게? 우선 SNS 계정이나 나의 내면에 떠다니는 이야기와 실체인 내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데서 시작해 보란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흐르는지 나를 깊이 ‘관찰’하라는 거다. 그러다보면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 머리칼을 흩뜨리다 가라앉는 것처럼 내 생각과 감정, 욕망들도 저절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을 거란다. 상당히 불교적이다.


▲ John Holcroft


사실 바람이 분다는 건 알지만 그 바람을 통제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내가 분명 체험하긴 하지만 체험한 것들을 내가 가질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 체험들의 합이 ‘나’도 아니다. 모든 게 그저 덧없는 떨림으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지속적인 본질도 완전한 만족도 없다. 


그럼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진 않으니 좌절하지는 말란다. 모든 게 인간정신이 만든 허구라 해도 ‘나’라는 실체는 분명 존재하니 말이다. 그럼 뭐가 허구이고 뭐가 실체인지 어떻게 아는가? 하라리는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고통’이란다. 어떤 거대한 이야기와 마주했을 때 이야기의 주인공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보면 된단다. 이를테면 민족이나 체제, 국가에 어떤 감각이나 감정, 열정이 있는가? 칼에 베이면 피를 흘리는가? 반면에 학대당한 어린아이는 어떤가? 아이가 느꼈을 고통은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잔인한 현실이다. 


그러면서 유발 하라리는 신경세포와 시냅스, 생화학 물질의 연결망인 뇌와 달리 아직 과학자들이 그 매커니즘을 밝혀내지 못한 ‘정신’에 주목한다. 고통, 쾌락, 분노, 사랑 같은 ‘주관적인 경험의 흐름’ 말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나’라는 실체만이 내 정신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매일 두 시간씩 명상을 한다고 한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위한 거라며 우리의 정신까지 제 입맛대로 결정하기 전에, 자신을 알고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앞으로 수 년 혹은 수십 년 동안은 그나마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으니 더 늦기 전에, 실체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자기 관찰을 어서 시작하라 당부한다. 


자, 그렇다면 나도 얼른 내게 맞는 요가원을 알아봐야겠다. 다음이나 네이버, 아니 구글에게 묻는 게 나으려나? 아무래도 페북이나 트위터가 더 빠르겠지? 




[필진정보]
김혜경 :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광주문화원 편집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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