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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가을꽃으로 화려하게 피어나는 감나무들
  • 전순란
  • 등록 2018-11-07 14:56:42
  • 수정 2018-11-07 15: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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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6일 화요일, 맑음



심야전기 보일러를 가동시키려면 집 뒤꼍에 있는 ‘기름보일러’를 끄고 닫고 다른 쪽 ‘심야전기 보일러’를 틀고 열어야 한다. 보스코가 내게 묻는다. ‘기름보일러는 보일러 안에 기름통이 들어 있어?’ 한 번도 보일러를 자세히 들여다본 일도 없고, 관심도 없고, 아래층 식당채를 덥히는 보일러와 2층 건물 전체를 덥히는 보일러가 어디 있는지도 구분 못하는 게 보스코다.


이 집을 짓고 25년을 살았는데 보일러실에 한 번도 안 들어가봤노라는 양심선언일까? 겨울철이면 한밤중에도 수시로 고장나 멈춰서는 심야전기 보일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도 따순 방에서 그 숱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니 복 받은 남자다. 오늘도 보일러실 안을 들여다보고 나오다 거미줄에 걸렸다. 나와서 보니 내 머리에 하얀 망사 모자가 얹혀 있다, 왕거미가 여름내 짠 ‘작품’이다.


내가 없을 때를 염두에 두고서 오늘 정색을 하고 두 보일러 사용 방법을 열심히 가르쳐 줬지만 영 ‘모른다’는 표정이다. 방안 청소를 하면서 액자 속의 시엄니에게 통사정을 한다. ‘엄니, 저 사람은 교육이 안 돼요. 나도 다른 묘책은 없으니, 그저 우리가 한 날 한 시에 함께 엄니를 뵙게 하느님께 잘 말씀 좀 해주세요’


집 지을 때 우리가 서울에 있었기에, 보일러실을 얼마나 불편하게 지었는지 사용할 때마다 서커스 수준의 묘기를 해야 보일러에 손이 가 닿는다. 보일러실 문턱이 1m 높이에 있으므로 벽돌을 쌓아 놓고 거기에 다리 하나를 걸친 후, 문틀을 잡고 날렵하게 튀어 오르듯 보일러실 안으로 들어간다. 아직은 할 만하지만 일흔 넘어 팔 힘, 다리 힘이 빠지면 저 보일러 조절과 수리는 누가 할까? 



그래서 빵기 빵고는 우리더러 이제는 20평정도 되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란다. 문제는 보스코. 자기는 절대 단독주택에 살겠다 하고, 나도 땅을 밟고 흙을 만지며 살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뜰의 장미나 가을의 단풍을 내다보며 떠나고 싶다. 아니면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 저 산이 되거나….


어제 도메니카가 지쳐 보이기에 소담정으로 찾아갔다. 그 몸으로도 일어나서 자기 밭 들깨를 털고 깻단을 태운다고 밭 가운데로 모아 쌓는다. 나도 엊그제 밭일을 하며 힘들고 삭신이 쑤셨지만 일을 하다 보니 되레 몸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죽도록’ 해서도 안 되겠지만 ‘놀이 삼아’ 일을 해가면 몸도 리듬을 되찾는다. 아랫논 밑에서는 유영감님이 밭의 콩을 베어 단을 묶으며 ‘올 여름 가물어 콩알이 별로 안 찼어’라고 투덜대면서도 ‘노느니 일을 하는 게 훨~ 나아’라는데 이제는 그 말씀에 공감이 간다.


휴천재 텃밭 밑으로 구장네 감나무 두 그루가 있어 구장은 매해 그 감을 댓가지로 따서 지게에 담아 지고 내려가 곶감을 깎는다. 올해도 감을 따면서 ‘몸이 안 좋아 나락만 포도시 끌어들여다 놓았고, 들에 콩타작도 아직 못했다’며 탄식한다. 홍시를 가뜩 내 바구니에 담아준다.


점심식사 후에 보스코가 우리 텃밭의 감나무에서 감을 따겠다고 내려가 감도 홍시도 다 바구니에 담아왔다. 10여년 자란 감나무가 해마다 열매를 떨구어버려 내년쯤엔 베어 버릴까 하던 참인데 올해는 열매를 달고 있다. 농익어 터진 감은 껍질을 벗겨 한꺼번에 담아 냉동실에 저장하고, 땡감은 놓아두었다 순서대로 먹을 생각이다.



유영감님이 당신네 밭에 있는 단감도 따가라고 하신 터여서 50여개 따왔다. 영감님 말씀대로 ‘옛날엔 먹을 게 없어 가을엔 홍시, 겨울에는 울던 아이도 멈추게 하는 곶감이 제일이었는데, 이제는 어린애들이 이상한 피자, 통닭 이런 것만 좋아하지 안 먹어. 아들들더러 따가라 해도 안 오고, 따다 줘도 통 안 반기니 재미가 엄서’ 하신다.


서울은 미세먼지로 준 전쟁 사태인가 본데 지리산 산골은 파란 하늘에 빨간 감이 밤하늘 불꽃놀이로 찬란하다.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온통 붉어진 감은 가을 하늘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꽃이다. 늦저녁까지 식탁 위에 단감이 벗을 하니, 오늘은 정말 감과 친하게 지낸 날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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