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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늦가을, 사람도 날짐승도 기나긴 겨울을 준비하는…
  • 전순란
  • 등록 2018-11-12 16:25:04
  • 수정 2018-11-14 10: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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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1일 일요일, 맑았다 흐리더니 가랑비



진이엄마 친정아버지께서 먼 길을 떠나셔서 아래층 식구들은 초상을 치르러 안동 친정에 가고, 우리 식구만 있으니 집안이 허전하다. 별 특별한 일을 함께하는 것도 아닌데 두 집안의 인기척과 온기가 서로를 의지하게 만드나보다. 아침에 일어나 동쪽 하늘을 본다. 태양이 왕산 위로 떠오르기 전, 아침노을이 파아란 하늘에 곱게 빗자루질을 한다. 한쪽으로 낙엽을 말끔히 쓸어놓고 커피 한 잔하는 기분이랄까?


공소회장 토마스 대신 보스코가 공소예절을 인도했다. ‘연중 31주일’에 했던 성가도 그대로 따라 하고, 칠판 글씨도 ‘연중 32주일’로 바꾸지도 않아서, 끝난 뒤 ‘어째서 그랬냐?’니까 별 생각이 없었단다. 자기 말고도 공소에 나온 그 누구도 그 글자가 지난주와 같다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란다. 하느님께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공소식구도 오늘은 최소였다. 



나이든 공소식구들은 노수녀님의 따듯한 언행에 마치 헤드빅수녀님을 다시 뵙기라도 한 듯 반기고 ‘우리 공소에 와서 사시면 안돼냐?’고 매달린다. 그 무렵 성당 안 다니던 아짐들도 헤드빅 수녀님이 오후 두시면 늘 커피와 간식을 마련하고 그니들을 기다리던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수녀님이 30년 넘게 이곳에서 사는 동안 가톨릭 신자가 된 사람들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가난한 청소년 여럿이 수녀님 도움으로 학교엘 갔고, 졸업 후 공무원이나 학교 교사 등 좋은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여교우 하나가 쯔쯔가무시병으로 몹시 힘들어 보인다. 작년인가, 산동 데레사씨가 쯔쯔가무시병으로 광주 병원에 입원했다기에 ‘구례에나 있는 병으로 알았더니 어느 새 우리 동네까지 왔을까?’라는 내 말을 아짐들이 동시 다발로 바로잡는다. 부면장댁도, 누구누구도 다 그 병을 앓았고, 하도 많은 사람이 앓다보니 함양 읍내 그 돌팔이 병원이 그 병에는 명의가 되었단다. 증세는 감기도 같고, 열이 39.5도까지 오르고, 발진이 나고, 온갖 곳이 쑤시고, 피부까지 아프단다. 나처럼 흙 위를 기어 다니는 사람은 조심해야 할 대상 1호가 이 병이란다.


공소에서 올라오던 길에 드물댁 처마 밑에 걸어둔 반건 곶감이 맛있어 보인다는 말에 드물댁이 아예 곶감 한 줄을 걷어서 수녀님에게 내준다. 우리 모두 한 개씩 빼 먹으며 어린애처럼 즐거웠다.


아침식사 후 부지런히 짐을 챙겨 수녀님을 삼량진으로 모셔갔다. 수도자에게 일 년에 10일 주어지는 휴가! 내 마음대로 보고 싶은 사람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날이 10일 뿐이라면, 나도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하고 아까울까? 수녀님도 이번 휴가를 알토란 같이 사용하여 삼량진을 끝으로 금쪽같은 휴가가 끝난다.


둘이서 돌아오는 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길을 강가로 달리며 물푸레나무 세 그루가 오늘도 물에 발을 담그며 놀고, 왜가리들도 군데군데 흐르는 강물에 서서 하염없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 비가 끝나면 늦가을 남은 잎들도 마저 질 테고, 사람도 날짐승도 기나긴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아침에 공소예절을 마치고 진이 외할아버지를 위해서, 같은 날 돌아가셨다는 도정 김교수님 누이를 위해서, 60년을 한국에서 선교사로 보내신, 보스코의 은사 모신부님을 위해서, 그리고 엊그제 금요일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피아골 피정의 집 담당 신부님을 위해서 ‘위령의 기도’를 다 같이 바쳤지만, 삼랑진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그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로사리오를 바쳤다. 11월은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이니까….


며칠간 빵고신부의 연락전화가 없어 허전했는데, 주일 저녁미사를 마치고 제주시에서 금악으로 돌아가는 밤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해 왔다. 수도 성직자를 아들로 둔 부모는 이래서 행복하다. 다음 주 살레시오회 총장님의 방문이 시작하면 우리 작은아들은 일주일 동안 통역 일로 다시 분주할 게다. 


큰아들도 보름만에 우간다에서 조금 전 가족한테 돌아왔단다. 뜻있는 일에 종사하는 아들을 둔 부모는 보람도 있고 가슴도 졸인다, 일년의 절반을 전쟁지역, 난민촌을 돌아다니니까…


보스코는 여전히 책상 앞이고, 나는 길게 앉아 모처럼 책을 읽는다. 창밖에 내리는 찬비가 조용조용하게 텅 빈 논을 달래고, 오랜만에 둘만 남은 시간에 밤의 평화가 잦아든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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