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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그동안 내가 본 교회의 모습 - 평신도 희년을 마무리하며…“교회 지금 어디로 가는가”
  • 김은순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8-11-16 11:29:52
  • 수정 2018-11-16 1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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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주일을 보내며 많은 생각에 잠겼던 하루다. 충주성심맹아원 김주희 양 사망 사건을 접하고 투쟁하며 본 교회의 모습은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신도는 공동체의 일원도 아니요, 그저 계급사회의 양반과 천민일 뿐이었다.


평신도희년을 마무리하는 ‘평신도 주일’에 본당으로 미사를 가지 않고 노동교회, 도시산업선교회를 찾았다. 조순형 전도사님께서 계시는 곳이라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다. 정진동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조순형 전도사님께서 주일예배 인도를 하고 계셨다. 지하실 예배 장소가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온기로 따뜻했다. 가정집 지하실 예배 장소가 마치 초대교회 동굴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속에 복음을 담아 빛을 주셨다는 말씀을 나눠주셨다. 질그릇은 된장 뚝배기처럼 값이 싸 깨져도 아깝지 않은 그릇으로 그런 그릇에 복음을 담아주신 것이다. 값비싼 청자도 백자도 아니다. 평범한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그 복음은 사랑이고 평화였다. 너도 가서 그렇게 살라고. 그런데 작금의 교회는 청자요 백자이니 복음을 담을 수가 있겠는가?


2009년 교리신학원 때 만난 신부님을 따르며 강학회를 했다. 교회 가르침을 듣고 읽고 묵상하면 어느새 내 마음은 성령 충만해졌다. “뼛속에 갇혀 있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딜 수 없었던”(예레 20,9) 예레미아 예언자처럼, 성령께서는 내 마음에 불을 지펴주셨고 내가 의도치 않았던 삶으로 나를 줄곧 인도해주셨다. 


신부님께서 교회헌장 4장을 읽고 평신도의 정체성에 대해 요약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신 덕분이기도 하지만, 2013년도에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에 대해 글을 썼다. 내가 세상 떠나는 날 두 아이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어 내가 쓴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과 함께 <교회헌장>, <평신도 교령>, <평신도 그리스도인>까지 함께 넣어 제본을 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대부분 보는 대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외적으로만 보고 판단하면 겉과 속이 달라 실수하기 쉽다. 결정적인 어떤 사건이나 무의식적인 상황에 부딪혀보면 그 사람을 좀 더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겉으로 봐 왔던 교회의 모습과 김주희 양의 사망사건을 접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쟁해오며 본 교회의 모습은 실로 달랐다. 내겐 너무 큰 충격이었다. 교회의 존재 이유도, 복음도, 사랑도 없었다. 교회구성원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일 뿐이었다. 일반 사회의 부정과 부패가 사건 속에 다 들어있었다. 상처투성이로 죽은 장애 아이는 생명으로 온전히 존중받지도 못하는 짐이요, 물건이었다. 한 생명의 억울한 죽음 앞에, 생명에 대한 예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종교인들의 행동에 낯이 뜨거울 뿐이다. 


장애가 있어 아파도 아프다 소리를 할 수 없었던 아이는 몸의 상처들로 진실을 밝혀달라고 말하고 있다. 상처들을 세상에서 꼭꼭 숨겨야 했던 이유, 있는 죄마저 무죄를 만들어냈어야 했던 이유, 교사들이 조직적으로 은폐하여 생활기록일지에도 적지 않았던 이유, 적어도 내 자식이 왜 그토록 처참히 죽어가야 했는지 부모는 알 권리가 있다. 6년을 자식 사망신고도 못 하고 있는 애끓는 부모마음에 종교인들은 먼저 ‘공감’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먼저 말해주고, 책임질 일은 책임지고, 보상할 일은 보상해주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종교구성원들의 민낯을 곳곳에 남겨 드러나게 해주셨다. 사랑의 씨튼 수녀회 측에도 알렸지만 조사 자체에 대한 의지도 없었고, 교구 역시도 귀 닫고 듣지 않고 있다. 감추는 자 범인이다. 교회시설장 대부분이 사제요 수도자인 것도 아주 큰 문제다. 그래서 교회사건의 중심에 언제부터인가 늘 사제와 수녀가 TV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게 됐다. 결국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교회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복음을 위해 세웠던 병원도 복지시설들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느님의 사랑이 사라진 교회엔 온갖 요란한 행사들로 가득하다. 그곳엔 사랑도 평화도 복음도 사라진지 오래다. 오직 신음하는 예수만이 계신다.


모든 사람들에게 절박하고 중대한 죄악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은 사목자들의 직무다. 사제의 설교와 그의 생활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의 말은 자신의 증거로서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위선자들아!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파, 너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무고한 생명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교구 시설에서 처참히 죽은 주희 양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택할 것인지, 죽음을 택할 것인지 묻고 계신다. 전자라면 교회에 희망이 있겠지만, 후자라면 암울하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먼저 ‘새로운 복음화’가 시급하다. 새로운 복음화는 먼저 교회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이다. 회심 없이는 성사참여도 무의미하므로 따라서 새로운 복음화는 향주삼덕으로 생활화해야 한다. 완전한 신덕 가톨릭교회교리서 1편, 완전한 망덕은 2편, 완전한 애덕은 3편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이 내용이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열의를 갖고 추구해야 할 새로운 복음화의 표현이고 도구이다. 


말씀은 오로지 그리스도이다.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교도권의 가르침인 교회의 문헌들이다. 


교구사제들은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징표인 세계화의 사조가 시장경제의 신자유주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 이미 알고 있다. 이 사조를 극복하는 새로운 복음화는 ‘개별성 안에 보편성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이 복음화는 먼저 성직자와 관련된 문헌과 가톨릭교회교리서와 사회교리서의 내용을 소화하고 모든 분야에 적용하는 신앙고백에서 실현된다. 


사제들이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앎을 실천해야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사제들이 먼저 복음화 되지 않고는 교회의 희망은 요원해 보인다. 


평신도 희년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내가 본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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