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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두더지 영감더러 엄지공주 데리고 피난가라고…
  • 전순란
  • 등록 2018-11-21 10: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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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0일 화요일, 맑음



아침 일찍 서재 뒷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까운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우리를 찾다가 대답이 없으면 2층 뒷계단으로 올라와 서재문을 두드리는데, 보통은 나를 찾는 소리다. 다만 주인 양반은 늘 방안에 계신다는(=방안퉁수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인규씨가 두어 번 왔고 드물댁도 서너 번째다.


어제는 드물댁이 자기집 처마 밑에서 말린 곶감을 주러 왔고,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내다 보니 ‘내일 날이 추워진다니 오늘 무를 뽑아 묻으라’는 제언을 하러 왔다. 올 무는 너무 작아 며칠이라도 크게 놓아두라고, 내가 서울 가더라도 자기가 뽑아서 처리하겠다더니 그새 맘이 바뀌었나 보다. 같이 해야지 자기 혼자 할 일이 아니라는 신념이 있다.


그래서 보스코와 법화사 걷기를 오전으로 당겼다.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날씨도 푸근해 소풍가는 기분으로 걸었다. 어제 밤 약을 먹고 핫백을 뜨겁게 허리에 대고 자고 났더니 몸도 멀쩡하다. 하루만 앓고도 회복되니 산 공기 덕분이요 엄마가 정말 건강하게 낳아주신 덕이다.


도정에는 10시 30분 도정발 읍내버스가 손님과 떠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차 옆면엔 커다란 광고가 나붙었는데, 어제 차에는 ‘보청기’ 광고, 오늘 차에는 ‘장례예식장’ 광고다. 이 지역 사람들 관심사와 필요가 거기에 다 드러나 있다. 유치원, 놀이동산, 옷가게, 식당 등이 아닌… 이 지역주민들의 나이를 가늠케 한다.


기사 아저씨도 내년이면 70이란다. 62세에 퇴직하고 막일과 건설현장을 전전했는데 연로하신 부모님과 미혼의 두 아들이 부담스러워, 다시 운전대를 잡았단다. 68년도부터 조수로 버스 따라 다니기를 시작하여 기사로 취직해 ‘기름밥’을 먹은 햇수만 50년이란다. 자신의 모든 세계가 버스 속에 있다며 지금까지 운전을 할 수 있는 것도, 젊은이들이 힘들다며 버스운전을 외면해서 자기 차례까지 왔단다.


“이젠 아들 둘 다 결혼하고, 내가 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큰아들은 ‘강원도 포수’로 어디서 뭘 하는지 소식도 전화도 없고, 큰며느리도 전화 한 번 없다” “딸자식 같은 작은아들은 며느리도 자주 전화하고 날 챙기니 둘 중 하나라도 그래서 다행이다” 승객도 없고 사람이라고는 모습이 안 보이는 산정마을 동구 밖에서 지나는 행인을 붙들고 기사님은 많은 얘기를 들려준다. 보스코는 걷기보다 저런 얘기를 경청하는 데 더 의미를 둔다. 



보스코를 재촉하여 법화사에 막 도착하였는데 귀요미의 전화. 도정 ‘맨드라미 아저씨’네 와서 이야기 중이란다. 보스코와 부지런히 산길을 내려오니 내 종씨 아저씨가 반가이 맞는다. 맥심커피를 큰 박스로 사들고 와서 ‘전 선생님’이라 부르는, 구면의 예쁜 여자에 반쯤 홀린 집주인은 미루가 가져온 커다란 김장비닐 두 개에 마당의 맨드라미꽃을 모조리 잘라 채워주고 있었다. 


‘언제나 저 맨드라미 꽃송이들을 미루가 일일이 따낼까?’ 힘들지만 좋아하는 일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해내겠지, 마치 내가 크리스마스 쿠키 굽듯이? 보스코는 트레이너한테 붙잡힐세라 얼른 이사야 차를 얻어 타고 뒤도 안보고 사라지고, 미루와 나는 산길을 걸어 집으로 내려왔다.


간단히 ‘김치볶음밥’을 차려 점심을 먹는데 드물댁이 빨리 나오라고 마당에 지켜 서있다. 내가 할 일을 자기가 앞장서니 고맙기도 해서 우리도 부지런히 텃밭으로 내려갔다. 드물댁, 미루, 나 셋이서 총각무보다 조금 자란 무를 뽑고 무청을 자르고, 무구덩이에 묻었다. 작년에도 이사야가 무구덩이를 팠는데, 올해도 그가 와서 해주니 내년에도 그가 와야 무를 묻을 게다.



이사야는 ‘두더지 방지용’ 해바라기도 설치했다.(텃밭의 연장 창고 ‘미루집’도 이사야가 조립해 준 것이다) 땅바닥을 울리는 진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두더지의 특성상 팔랑개비가 돌아가는 소리에 ‘이 밭에는 천재지변이 일어났다’면서 ‘엄지공주’를 데리고 얼릉 괴나리봇짐을 싸들고 떠나주기를… 내일은 기온이 많이 떨어진다는데 드물댁 덕분에 일은 시작했고, 귀요미네가 와서 함께 하니 재미진 놀이를 하며 오후를 지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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