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기해년(己亥年) 1월 1일 화요일, 맑음
어제 오후 4시쯤 단선생 치과에서 이를 빼고는 아직 마취가 안 풀린 어눌한 말투로 이가 아파 정신이 없어 서울집에서 쉬고서 1월 2일에 임플란트 기둥을 박고서 내려겠다고 보스코와 오빠에게 마지막 전화를 하고는 핸드폰 배터리가 2%밖에 안 남아 더는 전화를 안 받았다.
빵고신부가 일본에서 한일사제모임을 하고 돌아와 막 전화를 했기에 인사만 받고 끊으려니 ‘아빠가 엄청 걱정하시니 전화드리라’고 알린다. ‘배터리가 없어 전화를 할 수 없으니 네가 말씀 전하라’ 하고는 밤늦게 휴천재에 도착했는데,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보스코는 나를 한번 멀거니 쳐다보고는 아무 일 없었듯이 내쳐 베개에 머리를 묻는다. 아내가 서울집 휴식도 거르고 남편 걱정에 곧장 함양행 막차를 타고 달려온 길인데도…
그런데 오늘 아침 걱정이 된 오빠가 ‘어제 성서방이 엄청 걱정하더라’며 전화를 했다. ‘왜 그랬냐?’고 보스코에게 물으니, 마취주사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여자가 무려 다섯 시간 넘게 연락이 안 돼 걱정이 되더란다. 서울집 골목 슈퍼 유미엄마에겐 집에 올라가는 날 봤냐고, 오빠에게는 우이동 집에 있거든 우리 집에 올라가 보라고, 빵고에게는 엄마 좀 찾아보라고 전화를 하면서 ‘마누라가 어찌 됐을까봐’ 고루고루 소란을 피웠나 보다.
그러던 사람이 빵고신부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속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지 우습기도 했다. 바깥에서 놀던 애가 잠깐 집에 돌아와 엄마가 안 보이면 ‘엄마, 엄마!’ 울면서 찾아 헤매다 ‘왜 그래? 엄마 여깄다!’ 하면 ‘아! 여기 있었구나’ 하는 얼굴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습과 진배없다.
2000년 지구상의 제3천년대 해돋이를 보러 지리산에 온 승임씨네와 산청 왕산 꼭대기에 올라가보고서 19년 만에 오늘은 해돋이를 보러 갔다. 기해년 1월 1일 새벽 5시 15분. 새벽 기상을 하여 산청 왕산 기슭으로 구비구비 난 길을 달려 미루네 매장으로 가서 차를 두고 미루네 차를 타고서 6시 20분에 남해 파스칼 형부네로 떠났다. 7시 20분에 남해 바닷가 파스칼 형부 집에 도착.
미루처럼 적극적으로 삶의 기쁨을 찾아 엮어내려는 아름답고 섬세한 마음을 가진 이가 없다면 이런 새해 아침을 맞기는 쉽지 않다. 귀요미네에게 고맙다.
새해가 떠오르는 바닷가는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요염한 여인처럼 황홀한 빛깔이다. 우리가 앞으로 이 지상에서 저 여명의 황홀함을 몇 번이나 더 보겠는가!
형부네서 한 5분 떨어진 바닷가! 먼 바다에 뜬 섬의 하트형 골짝 심장 사이로 새해는 떠오른다. 새해의 새 빛을 보고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없다면 우린 이미 죽은 사람이다. 바다에 금빛 불기둥을 세우며 불끈 일어서는 해님에게 각자가 간절한 올 소망을 빌었다.
빙글빙글 도는 지구에 날마다 태양은 떠오르지만, 인도사람들이 저녁마다 지는 해를 영이별하고, 이튿날의 태양은 어제의 태양이 아니고 새로 태어난 시바신으로 반겨 맞듯이, 나날은 우리에게 은총이고 한 해 한 해가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 선물임을 감사드리는 시각이기도 했다. 그 바닷가에도 20여명의 젊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맞고 있었다.
언니가 준비한 정성스런 떡국과 푸짐한 설날 잔치상을 받고 우리 세 커플은 10시 30분 남해 성당 미사엘 갔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어느 천체물리학자의 말처럼 150억광년 크기의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 그 우주 저 한 구석에 푸르게 빛나는 한 점 지구에 태어난 한낱 여인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거창한 칭호가 주어지다니! 우리 여자들에게는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존칭인가!
미사 강론에서 신부님은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면서, 복(福)에 대해 다시 한 번 깨우쳐 주었다. ‘복되신 마리아’라고들 하는데 마리아의 생애가 과연 복된 분인가 묻는다. 세상 눈으로 보면 박복(薄福)하기 그지없는 여인이다. 미혼모로 아기를 낳고 온갖 욕설을 들으며 살았을 테고, 고통과 수치 속에 십자가형을 받고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보며 아들을 앞세운 여자에게 ‘여인 중에 복되시다’라고 하다니! 말하자면 신앙인에게 ‘복 받으라’라는 인사는 자기의 고된 인생을 하느님 손에서 고즈넉하게 받아들이고 맡겨들이라는 무서운 선고이기도 하단다.
미사 후 미조에 가서 형부한테서 전복죽으로 점심을 대접받고, 차를 한잔 하러 ‘독일마을’로 갔는데, 우리가 원하던 조용한 분위기는 이미 2년 전 그곳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로 끝이 나 있었다. 다음엔 우리 같은 ‘어르신들’도 앉아 있을만한 좀 더 조용한 찻집을 찾기로 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끼리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제는 이빨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데, 저 맑은 새해 새날을 마련해 준 친구들과 함께 해서 오늘은 참으로 ‘복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