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을 안다면, 종교심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이렇게 묻는다. '이 질문을 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나는 대답한다. '자신의 생명과 자신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생명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
- 아인슈타인 『나의 세계관』 중에서
종교는 우리 인생에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과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인간은 존재를 지속하기가 힘들다.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며 종교는 그러한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주어왔고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충분한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는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라는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도 외면할 수는 없다.
최근 한국사회의 적폐청산 과정에서 종교가 적폐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뉴스들이 많이 보도되었다. 박근혜 정부 ‘캐비넷 문건’에서는 종교인들을 활용하여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단식을 비롯한 진상규명 요구를 잠재우고 일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지속한 정황이 나온다. (한겨레 2018.10.24.)
여론을 움직이라는 공작이 권력을 통해 제기되기도 하고, 대규모 태극기 집회에 동원되는 종교인들을 바라보며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변승우 목사는 지난 해 11월 광화문에서 보수단체 시위를 주도하며 “문재인은 민족 반역자인가 아닌가. 반역자는 단지 탄핵만 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사형도 시켜야 하는가. 사형시켜야 한다. 반역자는 죽여야 된다. 역사를 보면 반역자는 사형시켰다. 극형에 처해 나라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민중의 소리 2018.11.28.) 목사가 민선 대통령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광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뜻하는 라틴어 ‘religio’는 ‘결합하다’ ‘단단히 묶다’라는 뜻을 가진 ‘religare’에서 파생됐다. 무엇과 무엇이 결합되는 것인가? 신과 인간, 모여든 사람과 사람이 결합하거나 단단히 묶인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경이로움(tramendum)’을 체험한다. 그것은 영성(spirituality)이 되고, 신학(Theology)이 된다. 그것은 어느 순간 제도(System)가 되고 교의(Dogma)가 되어 정형화된다.
형태가 규정되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변화하는 세상을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는 없다.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없으면 변화시킬 수 없고, 움직이지 않고 정주하면 변화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은 더 이상 경이로운 우주와 세상, 자연과 사람을 바르게 만날 수 없다.
하늘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근거해 태양과 별들이 내가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론화했다. 그것은 신앙이었고 종교였고 신학이 되었다. 사제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한 스콜라신학의 학문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다.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와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괴테의 말이다. 그러나 지금도 천동설 아래서 만들어진 수많은 교의와 교리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
현상과 본질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들이 많다. 나의 감각으로 관찰되는 것은 관찰자의 감각 곧 시각이나 청각뿐만이 아니라 경험과 학습에 따라 서로 다른 표현을 할 수 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보며 ‘천동설’이 진리였던 시대에 감히 ‘지동설’을 말한다는 것은 종교재판에 회부될 일이었고, 구금되어 일체의 표현을 억압당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질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러한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내 눈에 보이고 내 귀에 들리고 내가 한 경험과 내가 만난 사람들이 우주만물과 진리의 중심이라는 강한 확신을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생텍쥐베리 어린왕자의 지혜는 우리 삶의 여러 자리에서 정말 그러하다.
대단한 명성에 찾아가 보았던 인물을 보며 무척 실망한 일도 있었고, 사람들의 지탄과 멸시를 받는 이들을 만나 대화를 하며 큰 깨우침을 얻은 일도 많다.
대중들의 판단이 때로는 근거 없는 몇 사람들의 말에 의해, 혹은 의도에 따라 왜곡되거나 조작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 스님의 임종계는 현대인들에게 죽비가 되려나! 우리는 자신들의 친분관계나 이해관계에 따라 ‘산을 물이라, 물을 산’이라 왜곡하지 않았는가! 이 시대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가?
미신과 사이비
“미신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 후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선량한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의 돈을 긁어모으는 것이다. 돈을 적게 내기 때문에 불행이 온다거나, 돈을 적게 내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거나, 돈을 적게 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 복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 신은 물론이고 귀신들조차도 돈을 갖고 지저분하게 흥정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1879~1955)은 이 같이 말하며 기성종교에 대한 일침을 날렸다. 이미 백년 된 이야기다.
21세기에도 소위 이단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천주교 안에서도 여러 기적이나 발현체험을 중심으로 교회로부터 벗어난 종교 모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베사이다의 성모신심’이나 ‘나주 율리아 사건’ 등이 그러한 것일 수 있겠다. 최근에는 ‘신천지’라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통 이단에 대한 경고문이 교회의 여러 추문들과 겹쳐지며 대량유포 되기도 했다.
사이비(似而非)는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의 뜻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겉으로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 같지만 근본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이비다.
겉으로는 예수의 희생과 고통을 당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희생이나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사이비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역시 겉으로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 같은데 근본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사이비다. 또한 미신들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 헌금을 강요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위해 돈을 억지로 내라고 강요하는 경우들이 없지 않다. 그릇된 종교단체들은 얼마나 많은 경제적인 부담을 신도들에게 지우는가!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서, 기념물을 만들기 위해서,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명목으로 헌금, 교무금, 건축헌금 등을 강요하는가! 세계에서 제일 큰 우상을 만들겠다고 돈을 모으는 광경은 우습지만 슬픈 현실이다.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가 성폭력 범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그의 딸 이수진 목사는 예배 시간에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고 그를 죽였으나 그는 부활했다’ 전제하며 ‘세상이 이재록을 미워하고 죽였으니 그에게 남은 것은 부활’이라고 설교한다. 그 자리에 모인 오천 명의 신도들이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며 눈물을 흘린다. ‘종교탄압’이라 주장한다. ‘종교문제는 종교 내부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리와 이성을 벗어난 그들의 맹목과 맹신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예수는 회당의 부조리와 대사제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맞서 ‘성전은 기도하는 하느님의 집’이라 말하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정화한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사이비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수많은 교회의 단상들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일까. 그들의 공통점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믿는 것은 비슷한데 근본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돈벌이에 천착한다.
미래의 종교
하비 콕스(Harvey Cox, 1929년-)는 제3세계 종교운동과 평신도들의 종교운동, 타종교와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진보적 신학자로 라인홀드 니버(1892-1971), 폴 틸리히(1886-1965) 이후 신학계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그의 저서 ‘종교의 미래’에서 하비 콕스는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를 3시기로 구분했다.
‘신앙(Faith)의 시대’인 첫 시기는 예수 탄생과 사후 300년 정도까지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활동하던 때다. 교리나 성직계급이 없었고, 삶 속에서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고 믿음을 지켜가는 시기였다. 두 번째 시기는 ‘믿음(Belief)의 시대’로 이때 말하는 믿음이란 자신의 영적인 신앙에 기반을 둔 종교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가 신앙의 징표가 되어버린 시대다. 즉, 성직자 계급의 등장과 교회의 시대를 말한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가 현재인 ‘성령(Spirit)의 시대’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와 유사하게 개인의 영적 체험을 중시하고 공동체에서의 실천과 사회적 참여를 강조한다. 이런 현상은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그리스도교에서 눈에 띤다. 하비 콕스는 그리스도 교리보다는 각자가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의 신앙 실천을 강조하는 오순절교회, 남미의 해방신학 등에서 종교의 미래와 희망을 본다고 말한다.
하비콕스는 “1975년 즈음에 그리스도교는 ‘서양’ 종교이기를 그쳤다. (…)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 나라’라는 옛 영토에 거주하지 않고 지구의 남반구에 거주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교 운동이 가장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대다수는 흑인이거나 갈색인 또는 황색인이며 가난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언급하며 1900년에는 그리스도인의 90%가 유럽과 북미에 살았지만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의 60%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에 살고, 2025년에는 이 비율이 67%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도 내놓는다. 콕스는 제3세계 종교운동과 평신도 종교운동, 타종교와의 대화와 교류의 필요성에 주목하면서 교회가 사회변화를 위해 앞장설 것을 촉구해왔다.
교회는 종교, 인종, 이념,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는 기능을 해야 하며, 특히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가난한 자의 권리를 찾는데 힘써야한다.
세계 안에서 지속적인 창조에 협력한다는 것은 사회변화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폐를 청산하면서 미래 교회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에서 나오는 종교적인 감각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 전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종교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향하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의 주제가 어제나 오늘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더 이상 수직적인 교계제도는 수평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시대에 부합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이렇게까지 갑질에 대한 성토가 적나라하게 제기되는 시대가 있었던가! 페이스북의 수평적 네트워크와 소통은 기존 트위터의 수직적 팔로우를 넘어서고 있다.
성직자 계급 역시 평신도들과 수평을 이루는 땅으로 내려와야 하며 성직자들 간의 위계도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온전하고 역동적인 교회 모습이 되살아 날 것이다.
고위성직자, 평신도, 수도자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로 존중받고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벗’이라고 부르는 공동체, 벗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했던 예수의 가르침처럼 희생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 없는 복음이나 희생하지 않는 종교를 멀리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수도자가 사라지고 범죄를 은폐하는 성직자가 부끄러워하며 침묵하던 평신도들이 깨어나 교회의 주축이 되는 그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새로운 종교 신앙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2019년을 꿈꾸어 본다.
이 글은 <공동선> 2019년 1,2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