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에 의한 천기누설
주교님도 이십대까지 한 시절 평신도였지요. 성직자도 부제품을 받기 전까지는 평신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란 말이 교회 내에서 자조적으로 쓰인 출발점을 어디서 찾아야할 지 모르지만 평신도는 성직자 혹은 수도자가 되지못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대로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의 원천이고 바탕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원형질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 역사가 쉽게 펼쳐지지는 않았습니다. 민족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간헐적으로 우연의 접촉이 몇 번 있는 후 18세기 후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를 소리 내어 부름으로써 드디어 한국천주교회의 문을 연 것은 역사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마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라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그의 형 시몬에게 속삭이듯 소리친 것처럼 그것은 평신도에 의한 천기누설이었습니다.
하늘로 가는 사다리?
죽음으로 가는 사다리?
천주교회를 시작한 평신도들이 이른바 학문적 선각자였는지 몰라도 그들은 분명 ‘천주’ 앞에서는 바보스러울 만큼 순박하고 순했습니다. 이승훈 베드로가 멀리 북경에서 푸른 눈의 신부에게 첫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 무리들과 함께 자생적 천주교회를 열고 스스로 세례와 성사를 행했던 평신도성직제도에 대해 북경에서 날아온 “안 돼”라는 통지 이후 멈추었으며, 죽음 이후의 제사에 대하여 “절대 안 돼”라고 돌아온 낭떠러지 같은 대답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살자고 땅에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하는 “안 돼!”를 순박하고 순한 이들은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평신도들의 삶입니다.
본 적 없는 서양 높은 신부들과 하느님의 대리자가 모여 있다는 로마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내린 결정이 ‘하늘로 가는 사다리’일지, ‘죽음으로 가는 사다리’일지는 종잡을 수 없는 채 이 땅 초기의 천학쟁이들은 그 보이지 않는 길에서 아우성쳤습니다. 그것이 기쁨일까요? 슬픔일까요? 바둑에서 복기라고 부르듯이 ‘제사금지’라는 결정에 대하여 교황청이나 한국주교회의에서 죽은 자들과 도망친 자들 입장에서 한번 돌아본 일이 있나요? 목을 내어 놓고 죽은 사람들을 200여년이 지난 후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순교자’라 부르고 복자와 성인으로 추대할 때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은 제사금지 결정에 대한 교회인들의 뒤돌아봄이었습니다. 주교님,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작가 김훈은 <흑산>이란 소설에서 그 당시 천주교도들의 참혹을 닿을 수 없는 손으로 더듬으며 말합니다. 주리를 트는 자들 앞에서 “예”와 “아니오”가 같은 의미로 통용되던 세상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아느냐”는 막다른 질문 앞에서 천학쟁이들은 대답과 관계없이 모두 형장의 이슬이 되면서 어디에 있는지 모를 주님께 기도를 올렸겠지요. <흑산>에서 그들의 기도는 이렇게 표현됩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채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위 책, 105쪽)
순교? 국가에 대한 충성
그리고 황군의 정신
한국천주교회의 서막이 너무도 슬픈 역사지만 그나마 그 죽음이 주님을 향한 ‘순교’이고, ‘치명’이라 부르기에 선조들을 바라보는 가슴 떨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박해이고, 조선 집권자들에게는 무군무부(無君無父) 집단에 대한 박멸은 1886년 조불조약으로 종교자유라는 숨통이 트였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후 시작된 민족사의 급류는 이내 일본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치욕을 당했지요. 이미 해방된 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정이 가라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만큼 민족의 아픔이 큰 것이지요.
일제 강점기에서의 천주교회 친일행적을 거듭 말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민족적 치욕 앞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전가의 보도처럼 교회가 말한 ‘순교’는 여지없이 오염되거나 모욕되고 맙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교회 자신에 의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니 말 그대로 ‘하느님 맙소사’라고 해야 할 지, 아무튼 제 정신으로는 볼 수 없는 글들이 천주교회 기관지 <경향잡지>에 버젓이 실립니다.
순교는 무엇이뇨
“ … 치명은 천주의 진리와 의덕을 위하여 죽음이라 했다. … 국가에 대하여 매국적 행동을 함은 천주 엄금하신 죄악이라는 이유로 적군의 손에 잡힌 군사가 많고 만난 중에 죽을지라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켰으면 이는 국가의 충신임은 물론, 천주 대전에도 훌륭한 순교자, 치명자가 되는 것이다.”(경향잡지 914호, 1939년 11월호)
순교정신은 용맹의 정신
우리가 이미 천주의 진리를 알았고 천주의 계명을 알았으니 우리 순교선조들의 흘리신 피를 통하여 이 진리와 이 계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가를 다시금 알아보아 이를 지켜 나가기에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이다. 제 일선에서 격전하고 있는 황군을 본받으라! 탄환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비록 그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을지언정 한 걸음, 얼마 아니 되는 한걸음이라도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이 혹은 진지를 사수하고 혹은 돌격을 감행하여 용맹히 나가지 않는가. 그리고 황군의 이 정신 앞에는 세계에 적이 없고 현대의 예리한 적의 과학적 병기가 무색하다 하지 않은가!
가톨릭자는 모름지기 이러한 정신으로 천주의 진리를 굳게 지키고 천주께서 주신 자기 본분, 비록 범상하여 보이는 한 가지 본분이라도 결사적 정신으로 이를 지켜나가라.”(경향잡지 915호, 1939년 12월호)
로마보다, 명동보다 더 중요한 것
당시의 조선천주교회가 말한 것처럼 ‘탄환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강제징병을 나간 청년들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국어’로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교회가 말하던 용맹한 황군순교자들을 위해 교회는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진실처럼 ‘순교’는 소모품처럼 쓰였고 이내 버려졌습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고 오지 않는 역사는 없습니다. 모습이 다를 뿐 민족에게는 거듭거듭 밀물처럼 숱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고, 한국천주교회 앞에는 초기 평신도들의 순교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해석되고 분해되고 사용되어질 겁니다. 모두 죽지 않고 다스리는 불사신의 방편에 따른 것일 뿐 다스려지는 자들은 여전히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라”고 거듭 기도할 뿐입니다. 주교님, 변하지만 변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로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에 있고. 명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땅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