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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낡은 것을 밀어내는 일’
  • 전순란
  • 등록 2019-02-13 11:50:14
  • 수정 2019-02-13 11:5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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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2일 화요일, 맑음



보스코의 관상동맥 중 제일 중요한 가운데 동맥이 꽉 막혔단다. ‘심장이 더 이상 깨끗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합니다’라는 답을 듣고 지리산에 내려가 두고두고 그를 구박하려던 나의 요망사항이 무산되어 아깝다.


아빠가 걱정이 되는지 빵기가 엊저녁에도 전화를 했더니 아침부터 전화를 또 해왔다.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할지 밤새 머리가 복잡했던 사람이 나뿐이 아니었구나 싶어 위로를 받는다. 주변에서는 검사서류를 모두 챙겨가 ‘스카이병원' 즉 서울대, 삼성, 아산으로 가라는 투의 걱정인데 이러니까 지리산 할메들마저 ‘삼성 아산을 가야 산다’는 이상한 미신을 품게 만들었다.


큰아들더러 ‘어디로 가서 수술을 할까?’ 물으니 ‘삼촌이 흉부외과 과장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요? 우리가 믿고 맡길 분이니 그냥 거기서 했으면 좋겠다.’는 대답. ‘친척이 했다가 잘못되면 척진다’며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는 법이라지만 이런 미신도 벗어날 때가 되었다. 로마에 있을 때 주교황청 외교단 단장이자 로마대 병원의 유명한 외과의였던 산마리노 대사님은 암에 걸린 아내를 세 번이나 당신 손으로 수술했다.


‘보통은 그러지 않는데 어떻게 가능했느냐?’ 물으니 ‘내 아내를 나보다 더 잘 알고 나보다 사랑하여 아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녀의 병과 치료도 나보다 더 잘 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라는 자부심 있는 답변을 들었다. 아내에 대한 애잔한 사랑과 완치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에 가슴이 뭉클했었다. 15년 전 일이고 두 분 다 돌아가셨다지만…



문안 온 빵고신부도 ‘삼촌에게 맡기자’ 면서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전혀 다르니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지 말자’는 의견. 보스코의 뜻이 제일 중요하여 그에게 물으니 ‘동생이 여기 있는데 어디를 가냐?’고 한다. 걱정근심 할 것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


막억새 사이를 가르며 흐르는 냇물이 봄빛을 향해 내달린다. 앞산 백운대도 봄을 맞을 태세로 고개를 곧추세운다. ‘그래, 산다는 건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낡은 것을 밀어낸 자리에 새것이 자리를 잡는 것’. 보스코가 시우를 안아줄 때면 어린 아기의 곰살스런 손가락이 할아버지의 흰 머리카락 쓸어 올리고, 할아버지 얼굴의 굵은 주름 사이로 줄을 그으며 씨익 웃곤 했었다. 할베 얼굴에서 세월의 강이 주름처럼 물결친다. ‘내게도 저렇게 어린 날이 있었던가? 내가 늙은이로 태어난 건 분명 아닌데…’


엄엘리가 보스코 문병을 왔다, 아직 검사 중인데 문병이라니… 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병실에 올라가 보니 김경일 원장님이 와 있었다. 그분은 사명감을 갖고 일중독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을 그 구덩이에서 구해내는 일에 당신 인생의 남은 날을 바치는 전도사다. 보스코에게도 ‘하루 1000칼로리 이하 먹기’, ‘2시간 이상 걷기’, ‘내 먹을 것 내가 농사지어 먹기’, ‘아우구스티누스 번역 던져버리기’, ‘나밖에 할 수 없다는 망상 버리기’,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건 내 몸 챙기기뿐’이라는 고견을 내놓는다. 가만히 들어보면 극히 지당한 말씀이지만 보스코가 받아들여 이행할 항목은…



4시 30분 CCK에서 무슨 자문직 계약을 상의하러 찾아왔고 이어서 빵고신부가 아빠 병문안을 와서 아빠에게 기도와 강복을 주고 갔다. 아들에게 강복받는 보스코 얼굴의 흐뭇함이라니…


5인실 옆 침대 할아버지는 딸이 돌보는데 입만 열면 딸더러 '너는 왜 그렇게 멍청하냐?'는 아빠의 타박, ‘멍청한 아빠 닮아 멍청허요’라는 딸의 대꾸에 나 혼자 킥킥거린다. 퍽 다정한 부녀 같다. 창가에 누운 영감은 잠든 사이를 빼고는 내내 가짜뉴스 유투브를 보는 것 같다. 우리 주치의가 내일은 검사가 없다면서 보스코에게 외박을 허가했다. 


이 병원은 병실과 홀과 오가는 찻길을 점령하는 것은 태그끼아재들 같다. 종점인 9호선 급행을 타고서 출발을 기다리는 전철 안에서 큰소리로 월남전 무공을 자랑하던 할베들이 ‘5·18 그거 빨갱이여!’ ‘박근혜 배반한 놈들, 이번(전당대회)에 사그리 죽여야 해. 우리가 가서 판을 뒤집어놔야 해’ ‘육영수여사, 국모께서 흉탄에 돌아가셨을 때 난 세상이 끝난 줄 알았어…’라며 고성으로 맞장구치며 기염들을 토한다. 그들의 늙음이 참 역겹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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