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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걸음마에서 작은 돌맹이도 치워주고…
  • 전순란
  • 등록 2019-02-22 10: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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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1일 목요일, 맑음



열흘 가까이 열네 가지 검사가 끝나자 몸속에 남아있던 조사용 약물을 밀어내느라 그런지 보스코의 몸이 어지간히 지쳐있다. 초봄이면 부화장에서 감별이 끝나고 곧 죽을 것 같은 병아리들은 라면박스에 담겨져 초등학교 앞이나 골목 모퉁이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 고객들에게 팔려나간다. 노랗고 태엽을 감지 않아도 ‘삐약삐약’ 소리를 내고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살아있는 장난감은 아이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관심꺼리다.


병든 병아리처럼 ‘깜빡깜빡’ 졸던 보스코가 오늘은 좀 생기를 보인다. 어제 링거를 맞은 덕분인 듯하여 소담정 도메니카에게 점심을 하자고 했다. 지리산 둘레길 제4코스 중 용유담에서 의중마을까지 갔다 오는 길이었다는데 산비탈에서 작은 돌부리에 걸려 두 바퀴나 굴렀는데 어디가 부러지지는 않았다며 수호천사가 도와주었다 했다. 나이가 들며 내 수호천사도 하실 일이 많아져 분주하시겠다. 나도 이젠 조금 솟은 문지방이나 층계에도 쉽게 걸려 넘어질 때가 많으니 그만큼 발을 들지 않고 발을 끈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의 걸음마에서 가는 길마다 작은 돌맹이도 치워주시고, 문지방은 낮추시고, 층계는 손잡이로 이끄시는 분께서, 내 몸도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일을 최소로 줄이고 미연에 방지하는 일이 골병을 시작 않는 첫걸음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분이 누구시냐고? 나는 가끔 돌아가신지 60년 넘는 우리 시어머니가 늘 내 가까이서 날 돕고 붙잡아주심을 느끼고 고마워한다. 교회가 믿는 ‘모든 성인(聖人)의 통공(通功)’을 나는 결혼생활 45년에서 철저하게 체득하는 중이다.


2시 30분에 임봉재 선생님이 갑장 보스코에게 병문안을 오셨다. 올곧고 바른 길만 걸어 그 긴 세월의 언덕 위에 선 도인다운 풍모를 간직하고, 마음밭이 정갈하고 아름다운 분이다. 



나이 들어 동생 신부님과 살며 서로 의지하고 섬기는 삶의 행복에 푹 빠져 계신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치매에 걸려 딸을 ‘엄마’라고 부르며 따르고 의지하셨다는데, 그분은 누구에게나 엄마가 되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으로 ‘우리 씨앗’을 지키고 살리며 보급하는 노력을 단성의 자그마한 농가에서 언행을 일치시켜 보여주신다. 언니와 얘기를 하다보면 내 영혼까지 말끔히 씻겨 말간 햇빛에 말린 느낌을 주는 분이다.


언니는 5시경 윤희씨와 희정씨가 온다는 전화 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휴천재 언덕을 내려가는 언니에게 아우들이 ‘봉재 언니, 왜 그리 부지런히 가세요?’라고 했더니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날 어찌 아나?’ 하며 어리둥절해 하시더란다. 내가 워낙 초상권을 왕무시하다 보니 내 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알아보는 사이가 되고 만다. 두 아우들의 곰살스러운 방문으로 보스코는 모든 병에서 놓여나 이젠 ‘100% 나이롱환자’가 됐다. 두 사람은 우리 삶의 자락자락을 들춰가며 한참이나 휴천재를 맑은 소리로 채워주다 갔다. 아우님들과 어울림은 산골에 와서 사는 즐거움 하나다.



“그 여자는 성품은 영 꽝이고, 예의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며, 못되기로는 런던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다. 좋게 말해주고 싶어도 해줄 말이 없다. 참고로 그 여자는 내가 알고 지내는 가장 훌륭한 친구 중 한 명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재치에 넘친 이 소개 글을 읽고 ‘뿅’가서 박사(학위가 아니고 이름이다) 작가의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이란 책의 실상사 북콘서트엘 갔다.


저녁 프로에서는 박작가가 앙드레 지드가 지은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라는 책 중에서 한 꼭지를 낭송해 주었고,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선 중에서는 ‘어린왕자’를 낭송했다. 어려서부터 족히 열 번도 더 읽거나 들은 작품인데, 작가가 감정을 이입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눈물을 머금고 읽어주는 글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아! 「어린왕자」가 이런 글이었구나!”로 감상되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았고. 그의 넘치는 교양과 재치, 천재성, 인생에 대한 통찰, 그리고 독설이 넘치는 글을 읽어왔지만 남이 읽어주는 책을 순수하게 귀로만 듣는 느낌은 특별했다. 


행사 뒤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실상사 논에서 쥐불놀이도 하고, 군고구마도 얻어먹고, 다시 만날 인연이 거의 없는 한 저녁을 함께 지낸다는, 아주 생소하고 특별한 달밤이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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