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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 전순란
  • 등록 2019-02-27 10: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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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6일 화요일, 맑음



사랑하는 친구가 아침 일찍 정태춘의 ‘5.18’ 노래를 보내왔다. 요즘 딴나라당 인간들이 5.18을 놓고 얼마나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지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정상인들에게 그 미치광이 소리에 속상해하지 말고, 그날의 광주를 바라보라는 노래라서 들으며 내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북평화를 기원하면서 하노이 회담의 성공에 맘 졸이는 하루였고, 저런 회담이 성사될수록 기득권을 놓지 못하는 친일매국노들의 행태는 더욱 기승을 더하는 하루였다. 이엘리는 저자들의 행태에 울분이 받쳐 어제 하루 종일 정태춘의 노래를 들었단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그 꽃들 베어진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넘어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 …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너희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정태춘 노래 ‘5.18’에서)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해 보인다며 보스코가 ‘아무 일도 말고 푹 쉬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뜰에 나가 보니 작년 가을에 진 꽃이 눈비에 줄기만 남기고 겨울을 보낸 앙상한 가지들로 가득하다. 이대로 두었다간 막 오려는 봄을 그냥 돌려보낼 것 같아 하나 둘 가위질을 해서 한쪽에 쌓는다. 감나무 가지도 전지를 했다. 30년 넘게 우리 가족에게 단감을 수백개씩 맺어주던 나무가 얼어죽고 뿌리에서 새로 돋은 가지 하나가 살아남아 어미를 계승하였다. 올해부턴 주렁주렁 열릴 게다. 



뜰 곳곳을 살피는데 마당 끝이 앞집 담벼락 밑이라 걷어낸 낙엽 밑에 숨어있던 복수초나 금낭화 섬초롱이 눈을 반쯤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그래 춥겠다, 좀 더 자거라!’ 다시 낙엽을 고이 펴서 처음처럼 덮어줬다.


주목과 향나무도 손질을 해 보려니까 워낙 키가 커서 대책이 안 선다. 어쩔 수 없이 보스코의 사촌으로 오랫동안 조경사로 공직에 있었던 종호 서방님에게 S.0.S.를 쳤다. 하루 날 잡아 와서 우리 마당의 향나무, 비자나무, 단풍나무와 주목을 손질 해달랬더니 다음 주에 찾아와서 손 봐 주겠단다. 이렇게 지리산 휴천재의 배밭도, 서울집 나무들도, 심봉사 동냥젖으로 심청이 곯은 배 채우듯, 순하고 맘 착한 남의 남정네들의 시주를 받아 이 봄을 맞이하겠다.



내 운전면허증이 이리저리 헤져서 사진이 다 긁혀나가고 안 보인다. 면허시험장으로 재발급을 받으러 가기로 했는데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아래층 자훈이도 제주 여행 가서 면허증을 잃어버렸다고 같이 가잔다. 도봉면허시험장 사무실에 가서 재발급을 신청하고 막 돌아서는데 벌써 새 면허증을 내어준다. 이런 시스템이 얼마나 잘 돼 있나 어디 가서나 자랑하고 싶은 우리나라다.


집에 돌아와 막 신을 벗는데 한 목사가 우이동에 볼 일이 있어 온다고 잠깐 만나잔다. 한 달 가까이 못 봐서 궁금한 터라, ‘오후에는 제발 집에서 좀 쉬라’는 보스코에게 ‘내 친구 쬐끔만 보고 올게요’라고 한 마디 하고선 잽싸게 달려나가 북한산 발치를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방안퉁수 보스코에 비해 우리 두 아들이 역마직성에 걸린 걸 보면, 우리 둘 중 누굴 닮았나 알겠다. 


나는 외출을 하면서도 방안퉁수더러 혼자서라도 제발 뒷동산을 걸으라고 내보냈더니만 30분 걷고서 돌아왔단다. 아내가 걸리지 않으면 좀처럼 걸음마를 안 하려는 남편이라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달려가 줘야 할 사람, 내가 필요할 때 나를 위해 달려 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손가락으로 꼽아본다. 오고 갈 사람이 내게는 거의 같은 숫자라는 생각이 들며 뿌듯하고 행복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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