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17,1-15; 마르코 10,13-16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일들을 찬양하는 신앙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께 대해 갖추어야 할 충분 조건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일깨워주는 으뜸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칭찬하신 까닭도 하느님 나라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신앙을 강조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다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게 만들 수 있는 필요조건입니다. 그것은 선악에 대한 분별력은 물론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력 등 이성으로 나타나는 인간적 차원의 믿음입니다. 신앙이 인간이 신성 차원에 접근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라면, 인간적 차원에서 서로 통교하고 모두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믿음의 능력은 신뢰와 신용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찬양의 필요조건입니다.
어제 백주년을 기념했던 독립선언에 담겨 있는 가치들은 정의와 민권 그리고 동포애였습니다. 이 독립선언서에는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의 지도자 의암 손병희가 기본 가치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 유림식자층의 지식수준을 대표한다는 육당 최남선이 초안으로 작성했으며, 불교 측에서 만해 한용운이 공약삼장이라는 실천강령을 덧붙였습니다.
이 역사적인 문서는 조선 시대 이래 개혁파 유림이 보전하고자 했고, 서학인 천주교가 박해를 무릅쓰고 증거했으며,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주도했고, 개신교도 동의했는가 하면, 불교 역시 합의했던 가치들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적 차이를 넘어서서 인간 이성과 분별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 언어가 비폭력을 전제로 한 정의와 민권 그리고 동포애였던 것입니다.
이 가치들을 담은 독립선언의 뜻을 이천 만 동포가 환영하고 이백 만 시위꾼이 만세를 불렀으며 이에 화들짝 놀란 일제의 관헌들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제 이런 엄혹한 사정이 말끔히 가신 새 나라에서 백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민족 통합이라는 가치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개신교와 불교, 천도교와 유교와 천주교 등 5개 종단의 평신도 대표들이 모여 결성한 ‘3.1운동 백주년 종교개혁연대’의 이름으로 발표한 ‘2019년 한반도 독립선언’에는 “서로 다른 정치이념과 계급, 성, 세대와 종교 등의 차이로 갈등과 분쟁이 심각하다”며 3.1 독립선언의 정신을 이어받아 화합과 통일과 배려의 새날을 열어가겠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극복해야 할 목표로서, 탈성별, 탈성직, 탈분단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백 년 전 삼일독립선언에 들어갔던 정의와 민권 그리고 동포애와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이 일깨워주고 있는 민족 통합 등의 가치를 사회적이고 실용적으로 해석한 자세라고 보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신앙에 바탕을 두고 우리 민족이 다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큰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신앙인들이 반드시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종교적 신념을 달리하는 대한민국 시민들 사이에서 신뢰를 받는 동시에, 갈라졌던 북녘 동포를 포함한 전 민족과 인류로부터 신용을 얻는 것이 필요하고도 또 필요합니다. 민족 복음화에 있어서 신앙이라는 충분조건에 버금가는 필요조건이 이보다 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등 직분을 망라한 모든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고 힘 모아 실천해 나아가야 할 시대의 징표가 이 가치들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가치들을 이해하고 이 가치들로 소통하며 이 가치들을 솔선수범한다면, 북녘 동포들을 포함한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비로소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은 물론 다양한 민족들로 이루어진 온 인류가 가톨릭 신앙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종교인 대표들이 제시한 탈성별, 탈성직, 탈분단 같은 정신적 잣대들을 먼저 우리 교회 내부에 들이대어 쇄신해야 할 것이고, 우리 겨레가 정의와 민권 그리고 민족 통합적 동포애를 실감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깃발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각 종단이 보전하고 있는 종교적 진리는 이러한 사회적 증거의 프리즘을 통과해야만 그 진리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삼일독립선언 백주년을 맞이하여 선교의 새로운 개념을 되새기게 하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음으로써, 신앙을 쇄신하고 신뢰와 신용을 돈독하게 하여 모두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날을 앞당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