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이사 58,1-9ㄴ; 마태 9,14-15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에 대해 설파했습니다. 그러한 단식이란 단지 식사 끼니를 거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를 구현하고 사랑의 희생을 실천하는 모든 활동을 다 포함합니다. 단식 행위는 이를 위한 기도로서 욕망을 절제하여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자주 단식을 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 일행은 어느 안식일에 남의 밀밭을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어야 할 정도로 평소에는 배고픈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고쳐주시거나 도와주시곤 했는데, 그렇게 되면 도움을 받고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잔치를 베풀었고 예수님 일행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바리사이들로부터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아냥까지 듣기도 했습니다.
단식이든 식사든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지향이 더 중요한 것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이러한 생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눔의 행위였습니다. 애시당초 단식이든 식사든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지향이 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식을 자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행실을 하고 있다면 소용없는 짓이요,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더라도 하느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시는 이들과 사랑의 나눔을 벌이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권장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먹는다는 것과 굶는다는 것이 이렇게 다르고 또한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정의 취지에 따라 단식재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거니와 특별히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 적어도 사랑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먹는다는 것이 나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희생을 실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이고 형식치레만으로 단식이 이루어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사야의 질타는 이렇습니다.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오늘날 평균적인 가톨릭 신자의 경우, 단식재는 일년 중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지키지만 주로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이러한 질타의 목소리가 이천 오백 년이나 늦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형식적으로만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형식적 준수관행을 이사야는 악행이니 죄악이니 하는 엄청난 강도로 비판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형식적인 단식재 관행은 그로 인해 절약된 몫을 자선 행위에 투입하지도 않는다는 데서도 그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사순 제4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해서 특별헌금을 실시하지만 이는 단식한 몫과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별도의 부담일 따름입니다.
자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단식, 생활의 쇄신을 수반하지 않는 단식, 사순 시기 판공성사의 고해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서 하는 듯한 단식, 또는 이마저도 아예 관심 밖이라서 단식재도 하지 않고 걸러버리는 냉담자들의 태도 등등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다시 이사야의 외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굶는 것도, 먹는 것도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