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이해할 수 있는 것까지만 받아들이기로
  • 전순란
  • 등록 2019-03-20 10:14:58

기사수정


2019년 3월 19일 화요일, 맑음


▲ 휴천재 수선화밭


‘휴천재’엔 내일 저녁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인데, 서울 ‘빵기네집’엔 비 온다는 소식이 없어 내가 내려가고 없으면 누가 쟤들을 돌볼까 마음이 쓰여 새벽같이 일어나 물을 나눠준다, 너무 가물어 싹을 틔울 엄두도 못내는 식물들에게. 생명을 나누는 일이다. 며칠 전, 처음 나온 싹은 나물이라도 해먹을 요량으로 원추리에 물을 좀 주었더니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생기가 넘친다.


빵고방 밖으로는 예전에 연탄보일러 연통이 지나던 자리. 연탄을 안 땐지 30년은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굴뚝 자리 밑에서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다섯 번째로 연산홍을 심었는데 올해는 과연 그 오염된 땅에서 버틸지 모르겠다.



내가 만일 치매가 걸린다면, 결혼 초하루에 연탄을 36장씩 갈면서 이산화탄소에 상습적으로 중독돼 뇌세포가 절반가량 죽어서일 꺼다. 한번 망가진 흙 속에서 미생물이 살아나고 식물이 뿌리 내리기도 이토록 힘든데 화석연료 석탄으로 가동되는 발전소에서 뭉게구름처럼 하루 종일, 일 년 365일, 수십 년 뿜어 나오는 저 이산화탄소는 누가 다 마셔야 할까? 거기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전순란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나처럼 주부는 망가져도 가족은 망가져서는 안 된다고 희생적으로 연탄을 가는 아내나 엄마도 없을 텐데…


집사 총각들이 돌 볼 꽃들은 남겨두고 사흘에 한 번씩 물을 주거나 해님을 받도록 자리를 옮겨 줘야 하는 식물은 차에 싣고 내려왔다. 집사 총각들의 태도도 한 해가 갊아들며 많이 달라졌고 우리와도 많이 살가와졌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이해할 수 있는 것까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 앞 세대가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었듯이…


서울에서 한참 내려오는데 송목사가 셋째를 낳은 아내와 막 태어난 아가 사진을 보내왔다. 신생아는 내일 아침 8시부터 6시간 동안 대혈관전위수술을 받는다고 중환자실에 있다는데 고 조그만 생명이 태어나자마자 그 힘든 수술을 감당한다는 게 너무 안쓰러워서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1mm밖에 안 되는 가느다란 핏줄을 바꿔야 하는 아가야, 수술하고선 더는 아프지 말고 무럭무럭 크려므나!’ 



주말에 아범네가 몽블랑엘 갔다 왔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작은 손주 시우는 지금이야 잘 먹고 잘 크니까 염려 없지만 막 태어나서는 한 동안 강아지처럼 눈도 안 떴고, 몸을 뒤집는 일도 서거나 걷는 것도 느려서, 하는 게 다 늦어서 어멈이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우리 집안에 가장 힘든 시련처럼 느껴졌지만 지내고나니 다 하찮은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정상아였는데 좀 늦다는 차이를 부모가 못 견딘 것뿐이었다. 오늘 태어난 ‘송믿음’도 수심장의 대동맥과 대정맥을 바꿔다는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면 누구보다 건강하고 예쁘고 똘똘한 소녀로 크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얼마 전 나랑 ‘농업대학’에 같이 다닌 급우가 있었다. 결혼도 조선족 여자와 해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남자였다. 아들이 둘인데 그 중 작은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어렵다는 호소를 듣고선 성격이 괄괄했던 그는 아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대신 심하게 나무라고 두들겨 팼단다. 가여운 아이가 학교에나 집에도 내 편이 없다는 절망 속에 견디다 못해 농약을 먹고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된 게 어찌 애엄마 탓이었겠나만, 술을 먹고 자주 아내를 괴롭혀 여자는 가출과 귀가를 거듭했던가 보다. 내가 찾아갔던 날엔 ‘음주운전으로 차가 망가져 새 차를 계약했다’고 자랑했었다. 그러던 그가 얼마 전 남동생과 둘이서 만취상태로 운전하다가 둘 다 유명을 달리했단다. 남은 아내와 큰아들은 서로 의지하고 산다지만 ‘난 음주운전면허를 갖고 있어!’라고 큰소리치는 영감들과 젊은이들이 많아 대낮에도 자주 음주단속을 하는 시골의 일상이다. 삶이 힘겨워선지 남 목숨이 대수롭지 않아선지….


휴천재에 돌아와 제일 먼저 텃밭에 내려가 밭작물의 안부를 물었다. 동네 철 이른 목련은 피었지만 배꽃은 한 참 멀었고 매화도 시들고 피고 한참이다. 내가 없어도 고맙게도 드물댁과 합작하시어 하느님이 모든 식물을 잘 키워놓으셨다. 양파밭 멀칭한 비닐이 날아가 손질을 하는데 드물댁이 올라와서 손을 빌려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