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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라’는 율법적 굴레가 아니라 복음적 처방
  • 이기우
  • 등록 2019-03-26 17: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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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화요일 : 다니 3,25.34-43; 마태 18,21-35



오늘은 용서에 관한 복음 말씀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 말씀에 따라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는지 그리고 과연 어떻게 해야 마음으로부터 또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용서할 수 있는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즉, 용서의 대상과 범위와 방법이 오늘 말씀의 초점입니다. 그래야 용서하라는 말씀이 또 다른 율법적 굴레로 여겨지지 않고 복음적 처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3장의 말씀이 복음의 대상과 범위를 어렴풋이나마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아자르야의 입을 빌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리움받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지은 죄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 죄란 하느님 백성이라는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결과로 지도자다운 지도자도 없고, 종교의식도 권위와 생기를 잃어버렸으며, 정신적 구심점도 사라져버려서 주변 민족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신앙이 흔들린 결과는 백성 사이에서 서로 저지르는 죄 때문에 갈라지고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보잘것없는 무지랭이들로 전락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 혹시 이렇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두가이는 물론 바리사이 같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자로 군림하던 자들이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앞에 나서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백성을 하느님 앞으로 모아야 하는 목자요 지도자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백성의 대표 격으로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지요. 


로마 제국이 불의한 통치를 자행함으로써 구조악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에 굴종하던 사두가이 및 바리사이들은 백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수직 폭력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백성 사이에 도토리 키재기 같은 맘보로 소소한 죄들을 일상적으로 서로에게 저지르고 있으니, 수평 폭력으로 인해 서로 미워하는 관계가 한없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의인이 되기보다는 잔머리를 굴려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고자 약삭빠르게 처신하는 속물들이 대량으로 양산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해서 하느님의 뜻이 가로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 용서하라는 처방을 내리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백성 상호간에 잘못을 저지르고 원수가 되고 마는 일상적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처지라서 답답한 나머지 여쭈어봤겠지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아마도 베드로로서는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횟수를 따지지 말고 용서해 주라고 아주 단호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섬기라는 뜻으로 그 자비를 도무지 알지 못하는 어느 종의 사례를 비유로 드셨습니다. 그 종은 속이 좁아서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기 동료에게는 인색하게 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임금으로부터 자비를 입어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처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굳이 이 비유를 들어 가르치신 데에는 평소에 사람들이, 특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고 그 복음을 듣고 싶어 하던 백성이 정작 마음에 지녀야 하는 기본자세를 상기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기본자세는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이었습니다. 


60만 배에 이르는 만 탈렌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를 굳이 환산하지 않더라도 우리들 상호간에 관계를 개선하고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그 중심에 계셔야 하고 자비라는 가치를 밑바탕에 깔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거나 자비를 거부하는 자들은 이미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한 것이므로 대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달라도 좋습니다.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 내부에서 백성 상호간에 무한한 정성과 진심어린 마음으로 해야 할 용서이니만큼, 하느님을 부인하고 자비의 가치를 짓밟는 공동체 외부에 대해서라면 용서를 섣불리 베풀기보다 하느님을 믿으라고 촉구하면서 자비의 가치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일이 우선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도 않고 자비를 인정하지도 않는 그런 자들에게 용서하고자 해도 그 용서하려는 마음이 받아들여질지도 의문입니다. 오히려 용서하고자 하는 선의가 악의로 되돌려 받을지도 모릅니다. 선의를 악용하는 일이야 악한 이들에게는 비일비재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사해동포주의적 윤리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고 또 불러야 하는 사이에서는 서로의 약점과 시행착오와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명백히 테두리가 정해져 있는 공동체의 윤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백 데나리온 어치의 작은 용서를 행한다 해도 하느님께로부터는 그 육십만 배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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