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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은 각자가 평생 그려온 그림'이라던데
  • 전순란
  • 등록 2019-04-26 10: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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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5일 목요일, 흐리고 비



덕성여대 뒷길에 늘어선 벚나무는 그 찬란했던 기억을 모두 땅 위에 떨구고 남은 시간을 보낼 장고에 들어갔다. 꽃잎이 떨어지고 작은 열매에 남은 꽃술은 작을 열매의 길잡이지만 마치 털빠진 병아리처럼 볼품이 없다. 


‘동아슈퍼’ 코너를 돌면 “여기는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방송 멘트가 나온다. 누가 보고 있다는 그 시선에 양심은 한 번 더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데 누구도 보는 이 없는 곳에서도 지켜내는 양심은 더 큰 인간성의 승리다. 종교인들은 신 앞에 선 존재로서 늘 신의 시선을 느끼고 그 시선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 점에서 ‘양심적인 무신론자’는 우리 종교인들보다 훌륭한 셈이다.



덕성여대 돌담 코너에 예쁜 단층집이 있는데 마당 구석에 사람 크기만 한 성모상이 세워져 있어 20년 넘게 거길 지나갈 때마다 대문 틈으로 들여다보며 '성모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드리고 다녔다. 그 집이 이사를 가고 새 주인이 이사해 오며 철거를 했는지 전주인이 모셔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집에 들어서며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서운하다. 우이동 대로에서 버스를 내려 우리 집까지 오려면 딱 중간 지점이어서 성모님께 힘을 받고 남은 길을 걸어 올라왔는데...


인생에서도 힘 받던 사람이 사라질 때 나머지 생이 고달파진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에게서 살아가는 힘을 받고 그들에게 살아가는 힘을 나누는 기쁨에서, 그리고 죽어서도 하느님 품에서 그들을 고스란히 만나리라는 희망에 구원이 보인다.


10시 30분에 낙성대역에 있는 치과엘 가야 해서 4호선 전철을 탔다. 전형적인 ‘틀딱’ 하나가 착하디착해 보이는 처녀를 붙잡고 ‘바끄네를 석방해야 하는 이유’에 열변을 토하고 있다. 처녀 신세가 딱해 보여 내가 끼어들어 사이에 서자 이번엔 그 늙은이가 관심을 돌려 내 앞에 앉아 있던 젊은 여인들더러 일어나 나한테 자리를 양보 해 드리란다.



‘괜찮아요.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니 갈 때라도 편히 앉아서 가야 하지 않겠어요?’ 했더니만 제 정신이 돌아왔는지 제법 바른 속말을 한다. ‘늙은 것들이 뻔뻔하게 공짜로 전철 다니면서 미안한 줄도 몰라. 나야 집도 절도 없는 거지지만 당당하게 차표 사서 다닌다. 늙은것들은 다들 빨리 죽어야 해.’ 나이 들수록 부끄럼 없는 아재들도 속으론 저런 생각은 하는구나 싶어 아무 대꾸도 안 했다.


아이들이 그 여리디여림만으로 존재 자체가 사랑스럽듯, 늙는 사람들은 그 주름지고 쇠약한 모습만으로도 호감이 멀어진다. ‘사람의 얼굴은 각자가 평생 그려온 그림’이라던데, 칠순된 내게서도 젊은이들이 적어도 할머니다운 포근함과 의젓한 매무새를 보았으면 좋겠다.



드디어 20년 넘게 써 왔던 부분틀니를 치우고 임플란트로 새 치아 두 개를 심었다. 오랫동안 내 몸의 일부로 존재했던 틀니를 바라보니 작별이 아쉽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웠던 호박엿을 먹다가 그만 틀니를 씹어 부서진 고리 땜에 한국까지 돌아와서 새로 했던 틀니. 서울에 한 열흘 머물러야 하는데 지리산 집에 두고 와서 진이엄마에게 택배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던 틀니. 여행 중 잊어버릴까 너무 잘 두었다가 놓아둔 자리가 기억 안나 애를 먹이던 틀니....


최근엔 함양의 치과의가 느슨해진 고리를 조여 주며 ‘더는 조일 수 없을 만큼 오래 썼으니 부러지면 이젠 임플란트를 하세요.’ 했는데 예기치 않게 반대편의 어금니를 빼면서 틀니와도 덩달아 결별을 하게 됐다. 시원하다거나 새 이빨을 했으니 편하다는 생각보다 앞으로 내 삶에서 떠내 보내야 할 많은 것들에 대한 이별연습 같아 허전하다.



희정씨가 주문해 준 파티션이 택배로 도착했다. 버드나무 잔가지로 만들었다는데 생각보다 보기 좋았고, 봄비가 가랑비로 내리는 마당에 구석의 더덕들을 한데 옮겨 심어 파티션을 타고 오르게 해 주었다. 화초나 채소의 부드러운 줄기나 포기를 만질 적마다 창조주이신 분의 손길을 함께 느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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