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있었던 4.27 판문점 선언을 축하하며 지난 4월 27일 청와대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교황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면 분열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형제적 연대에 기반한 미래를 희망하라”고 주문했다.
형제적 연대에 기반한 미래, 통일된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 사회가 지금 갈등하고 있는 문제들을 생각해 본다. 갈라진 남북이 주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한 난처한 상황이 조선왕조가 무너질 즈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남북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속살도 많이 갈라져 있다. 고위공직자들의 비리 행위를 감시하고 견제하자는 ‘공수처법’과, 국민들의 뜻이 더욱 반영될 수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강화하자는 선거제도 개혁을 죽을힘을 다해 막고 있는 막장 정당을 바라보며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다.
4월의 슬픔이 봄과 함께 다가왔다. 생기 가득한 봄이 부담스러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은 슬픔을 넘어 미래를 바라보며 진실의 길을 열어나가고 있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할 수 없는 근거들을 준비하고 힘을 모으고 있다.
그런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향해 때맞추어 거친 말을 쏟아낸 의원들이 하나같이 다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은 천주교 사제로서 부끄럽고 죄스러운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 신자 정치인들을 혼내지 못하는 교회공동체가 슬프고 답답하다.
5월이 다가오면서 다시 치밀어 오르는 빛고을의 슬픔은 이제 국민 모두의 것이 되어 나누어지고 있다. 그런 오월에 전두환이 쏟아낸 막말과 거짓은 천주교 사제 조비오 신부를 향한 것이었지만 교회의 장상들은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모두 존엄한 인간생명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역사적인 과오였고, 아직도 수많은 의혹을 풀지 못한 사건들이다. 교계가 낙태죄 폐지 반대를 외치며 생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면 왜 이렇게 비참하고 억울하게 무너진 4월과 5월의 생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평화의 사도로서 선교하는 교회는 지금 이러한 하느님 백성들의 삶과 고뇌에 얼마큼 다가서 있는가? 통일을 염원하며 싸우는 수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 한마디를 건네주고 있는가? 저 멀리 바티칸에서도 통일을 염원하는 교황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이 성령의 바람처럼 불어오고 있는데 정작 이 땅의 주교들과 추기경들은 고통 받는 그들에게 무슨 말 한마디를 던져주고 있는가?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김용균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찬란한 젊음이 순식간에 무너졌을 때, 이 땅의 젊은이들을 향해 어찌 위로의 말 한마디를 던질 수 없었는가?
5월 1일 노동절을 앞두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배기현 주교)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가운데 하나는 결사의 자유(제87호, 제98호)다. OECD 국가 중 결사의 자유를 비준하지 않은 국가는 미국과 한국뿐이다. 사회적인 시각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대기업은 노동조합을 허락하지 않는다. 교회 내 노동하는 수많은 임금노동자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결사는 허락되지 않는다.
미국과 한국뿐만 아니라 종교 노동 역시 세상과 다르지 않은 노동이 존재한다. 노동이 존재하는 곳에는 자본의 숨겨진 탐욕이 항상 위험인 것이다. 이미 교회의 ‘화폐’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자본’으로 진화한 지 오래됐기에, 교회 역시 그들의 노동을 봉사와 희생의 열정페이가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에 이른 최저임금체계와 노동법에 근거하여 적절한 보상을 해 야 한다. 담화문은 그동안 많았다. 그러나 담화문에 따르는 실천은 보이질 않는다. 그것은 세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역시 해당되는 문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멀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정의, 평화, 통일, 일치, 화해, 나눔, 공존, 공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