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전 세계 주교회의 의장단 회의 이후 예고했던 성직자 성범죄 퇴치를 위한 자의교서가 발표되었다.
새 자의교서는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Vos estis lux mundi)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는 지난 4월 바티칸 시티의 성범죄 관련법을 개정한 자의교서와 달리, 전 세계 13억 가톨릭신자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자의교서다.
이번 자의교서의 골자는 성직자·수도자에 의한 성범죄 신고의무화 규정과 조사 독립성·공정성 보장을 위해 성범죄가 발생한 교구의 상위에 있는 대교구 또는 교황청이 사건을 직접 조사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이다.
성범죄 신고의무화, 성인 대상 성범죄도 신고의무 대상
먼저 1조를 살펴보면 ‘성직자 또는 수도자와 연관된 신고’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조항은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성직자 성범죄에 적용되는 ‘여섯 번째 십계명’ 위반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전까지는 내연 관계, 아동성범죄 등이 모두 ‘여섯 번째 십계명’ 위반으로 뭉뚱그려졌다면 성직자 성범죄 신고를 규정하는 이번 자의교서는 신고대상이 되는 성범죄를 ‘폭력, 위협 또는 권력 남용으로 한 개인에게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거나 가하는 경우’(1항 a. i.), ‘미성년자 또는 약자와 성행위를 하는 경우’(1항 a. ii.) 그리고 ‘아동음란물을 통신망을 이용해 생산, 상영, 보유, 배포하고 미성년자나 약자를 음란물에 참여시키기 위해 고용하거나 부추기는 경우’(1항 a. iii.)로 규정했다.
뿐만 아니라 성범죄가 발생한 교구의 주교들이 ‘성직자 또는 수도자를 대상으로 열린 민간당국 조사 또는 교회법적, 행정적, 형사적 조사에 개입하거나 이를 회피하려는 목적의 행동 또는 태만’(1항 b.) 역시 신고대상이다.
이는 동일한 목적으로 발표된 2016년 자의교서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에서 ‘태만이나 궐함으로 개인이나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손해를 입히는 행위에 가담하거나 이를 조장하는 경우’라는 표현보다 법적인 측면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뿐만 아니라 약자(vulnerable person)에 해당하는 성인에게 가해지는 성범죄 역시 신고 대상으로 규정하고 ‘권력형 성범죄’를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 4월 초 바티칸 시티에 적용되는 자의교서와 같은 기조로, ‘약자’ 개념에 신체 또는 지적 장애로 인해 사리판단이 어려운 대상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 처해 일시적으로나마 이해력과 의지력 또는 피해에 저항할 능력을 제한당한 모든 사람’(1조 2항 b.)을 포함시켜 법적 ‘약자’의 개념을 확장했다.
모든 교구는 이번 자의교서 발효일로부터 1년 이내에 이 규정들을 모두 적용해야하며 ‘적합한 교회 사무처 설립을 통해 (성범죄를) 신고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상시적이며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한 기구를 도입해야한다’(2조 1항).
신고의무화 규정은 3조에 적시되어 있는데, 3조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성범죄) 사실에 관한 정보를 인지하거나 그러한 사실이 일어났다고 여길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마다, 해당 성직자 또는 수도자는 이를 사건이 발생했을 지역의 교구장 또는 다른 교구장에게 지체 없이 신고할 의무가 있다’(1항)고 규정하고 있다.
성범죄 신고자에 대한 편견, 보복, 차별 금지
‘3조 1항의 방식을 이용하거나 이외의 다른 적절한 모든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든 (성범죄와 같은) 행실과 관련된 신고를 접수할 수 있다’(2항)고 규정한 뒤 ‘신고는 직접 또는 교황대사를 통해 교황청에 제기될 수 있다’(3항)고 적시했다.
또한 교회 성범죄를 신고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비밀유지 의무 위반을 구성하지 않는다’(4조 1항)고 못 박았다. 신고자에 대한 ‘모든 편견, 보복 및 차별은 금지되며 이러한 행위는 성범죄와 동일시 될 수 있다’(2항)고 강조하고 ‘신고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그 내용에 관해 침묵을 강요할 수 없다’(3항)고 규정했다. 이처럼 이번 자의교서는 교구나 주교들이 신고자의 신고의무 행사를 방해하는 것을 위법으로 규정했다.
이를 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을 쓰기도 했던 기자 오스틴 아이버레이(Austen Ivereigh)는 자신의 SNS에 “일부러 사건 해결을 지연시키는 주교, ‘공동체를 생각하라’며 (사건을 은폐하는) 수도장상, 자기에게 순명하라고 말하는 리더의 행위는 이제 모두 불법이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교회 당국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이들을 비롯한 이들의 가족들이 존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5조 1항)고 규정하면서 성직자 성범죄 해결에 피해자우선주의를 채택했다.
성범죄 처리에 태만하거나 주교 본인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언제나 자신보다 더 높은 교회 당국에 사건이 이첩되도록 규정했다. 그리하여 8조는 교구에서 발생한 사건은 대교구 또는 교황청으로, 대교구에서 벌어진 사건의 경우에는 교황청으로, 교황대사의 경우에는 국무원으로 사건이 이첩되어야 한다.
사건 처리는 90일 이내에 이뤄져야
신고 내용에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 이상 사건을 이첩 받은 대주교는 관련 교황청 부서에 조사를 요청해야 하며, 요청을 받은 교황청 부서는 30일 이내에 각 사례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10조).
그러나 언제나 반드시 교구는 대교구가, 대교구는 교황청이 맡아서 성범죄를 처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관련 부서에서 대주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조사를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사실을 통보받아야 한다. 대주교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에게 모든 중요 정보와 자료를 이관 한다’(11조 1항)고 밝혔다.
대교구가 조사를 진행하는 경우 교회 문서고를 비롯한, 민간당국 자료를 요청하여 수합하거나 피해자 증언을 수집한 뒤 ‘30일 간격으로 대교구장은 관련 부서에 사건 추이에 관한 보고서를 전달한다’(12조 9항).
그리고 대교구는 사건 조사위원회를 꾸릴 때 ‘대주교가 원하는 누구든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13조 1항)고 규정함으로써 조사위원회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모두 포함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조사는 총 90일 이내에 종료되어야 하며,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조사 기한 연장 신청을 할 수 있다(14조). 이번 자의교서는 3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되며(19조), 오는 6월 1일부터 발효된다.
피해자들, “민간당국 신고의무화와 가해 성직자 처벌조항 빠져”
성범죄 신고를 위한 구체적인 사항을 적시했다는 점에서 강력한 자의교서이기는 하지만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한 모든 가톨릭신자가 민간당국에 범죄를 신고하게끔 의무화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국제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단체 ECA(Ending Clergy Abuse)는 자의교서 발표 직후 성명서를 내고 “민간당국 신고의무화 규정이 없고, 신고·조사·조사결과의 투명한 공개 조항도 없으며 가해를 저지른 성직자들의 처벌 규정이 없다”고 비판했다.
새 자의교서 발표 이후 교황청 미성년자보호위원회는 SNS을 통해 “아동성범죄 뿐만 아니라 성인 약자와 성행위를 하기 위해 폭력, 위협 그리고 권력 남용을 하는 경우도 포함되었다”며 일명 ‘권력형 성범죄’가 신고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가톨릭매체 < NCR >에 따르면, ‘어째서 이번 자의교서가 민간당국 신고는 의무화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신앙교리성 차관보 찰스 시클루나(Charles Scicluna) 대주교는 나라마다 법이 다르다는 점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법이 너무 경직된 경우에는 아예 효과가 없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클루나 대주교는 “이번 법이 중요한 것은 의무에 관해 명확한 입장을 표현했기 때문”이라면서 “폐쇄적 사고방식이나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보호하려는 잘못된 입장이 성범죄의 공개를 저지해 왔으나 이 법으로 인해 ‘공개’(disclosure)가 교회의 주요정책이 되었다. 이는 ‘침묵’이 아닌 ‘공개’가 핵심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