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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란 원한이나 앙심으로 잃어버릴 뻔한 자유를 되찾는 것’
  • 전순란
  • 등록 2019-05-22 10:06:14
  • 수정 2019-05-22 10: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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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1일 화요일, 맑음


▲ 큰아들이 보내온 니제르 사진


어제 오후 보스코가 잠들 때 쓰는 양압기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나서 내가 한 시간에 한번은 일어나 기계의 공기압을 낮추어주다 보니 나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던 것처럼 피곤하다. 그러나 보스코는 그 소리가 전혀 안 들렸다니 복도 많다! 그가 건강한 이유는 필요 없는 일에 귀 기울이거나, 쓸데없는 일에 마음 쓰는 일이 없어서일 게다. 게다가 욕심도 없고 남에 대해서 좋게만 보는 눈을 가졌으니 그건 타인을 위해서보다 보스코 자신을 위해 더 좋은 일이겠다.


쟈크필립은 “용서란 원한이나 앙심으로 인해 잃어버릴 뻔했던 자유를 되찾는 것”이라고 했다. 애정으로 상대에게 종속되어 있음과 마찬가지로, 용서 못할 때 원망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묶어놓음으로써 자유를 잃어버리고 그 사람에게 종속되어버린단다. 부정적으로 살 때 사실 제일 큰 피해자는 증오를 받는 사람보다 증오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 큰아들이 보내온 니제르 사진


오후에 보스코의 양압기를 고치러왔다는 기사는, ‘밤에 고장나 소음을 발하는 동영상을 찍어 보내주면’ 고쳐주거나 바꿔주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얘기만을 남기고 갔다. 고객이 한 밤중에 일어나 ‘달밤의 체조’를 해야 한다? 이럴 때는 소리나 반응에 둔한 게 인생에 도움이 된다.


쓰레기를 버리고 빨래를 널고 집을 나서려니 집에 아무도 없다. 구총각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 있느냐? 어딜 갔느냐?’ 물으니 학교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화요일이다. 왜 내 머리엔 요일이 입력되어 있지 않았나? 보스코가 곁에 없어 주말이라고 생각했나보다.


한가한 주중이려니 생각하고 보스코가 1박 2일의 모임을 마치고 나를 기다리겠다는 대전 정림동 살레시오 청소년수련원으로 떠났다. 그런데 주말도 아니면서 고속도로는 왜 이렇게 막히는지, 4시간 반이 걸려서야 겨우 대전엘 갔다. 나야 그렇다 치고 저 운전기사들은 무슨 일에 저리도 바쁘고 분주할까? 


‘이렇게 차가 정체되는 걸 보아 저 끝에 추돌사고가 있거나 도로공사 구간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고 여기고서 7km 구간을 한 시간 걸려 기어갔다. 그런데 그 끝에는 아무 이상 징후가 없었다! 음성, 오창 등에서 나온 15톤 이상 트럭들이 시속 60km도 안 나오는 속도로 서로 추월을 하다 보니 늦는 속도가 누적되어 그렇게 느려진 것이다. 인간들의 욕심과 뻔뻔함 등 총체적 이기심이 서로를 교통지옥에 묶어둔 결과였다. 인간 다반사가 이런, 별다른 이유도 없는 일로 정치판을 서로 지옥으로 끌어가는 요즘은 다들 한꺼번에 망하겠다고 기를 쓰는 형국이다.



1시가 넘어 정림동에 도착하여 원장신부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곳 원장 최신부님은 빵고와는 입회 동기다. 하지만 고등학교 갓 졸업한 빵고와는 달리, 이미 군대를 갔다 온 처지로 지금 관구장 신부님과도 입회동기였다. 그러고 보니 관구장을 비롯해서 수련장 위신부, 관구경리 최수사, 관구비서 빵고까지 모두 입회 동기들이니 그 또래가 말하자면 살레시오를 이끌어가는 중추를 맞는 위치에 도달한 셈이다. 하지만 내게 빵고신부는 늘 막내아들로만 보이니, 지금쯤은 ‘파란불에 건너가거라’ ‘건너기 전 양옆을 꼭 살피라’는 잔소리를 더는 해서는 안 되겠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원장신부와 함께 점심을 한 보스코가 점심에 돈까스도 먹었다고, 최신부가 먼저 내게 일러바친다. 내가 얼마나 남편을 엿본다고 소문이 났는지, 최신부의 그 한마디로 알겠다. 그런데 보스코는 ‘치즈까지 들어 있어서 엄청 맛있었다’는 말까지 스스로 보탠다. 저런 순진한 사람을 두고 나로서는 어찌 식사단속을 할 것인지 대책이 안 선다.



오후 3시가 되서 휴천재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 만개했던 화단의 불두화는 발아래 하얀 앞을 다 떨구었고, 아이리스도 끝물이다. 반면 5월의 코스모스장미가 담장을 멋지게 장식했고, 끈끈이대나물과 패랭이, 작약이 절정을 넘어서고 있다. 꽃은 피고 지고 세월은 가고…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난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살아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시바타 도요. 「약해지지마!」에서) 지리산의 자연은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생명의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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