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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한 이들을 높이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는 해방
  • 이기우
  • 등록 2019-05-31 08: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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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 스바 3,14-18; 루카 1,39-56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행복


오늘은 성모성월을 마치며 성모 마리아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당시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처지에서 아직 친정집에서 머물던 처녀였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리라는 전갈을 전했고 잠시 망설이던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간직해 온 믿음으로 그 전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이미 아기를 가지기에는 늙은 나이였던 친척 언니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안배하심으로 아들을 잉태하였다고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이 없다는 증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 일은 부모님께도 정혼자 요셉에게도 차마 알릴 수가 없는 처지여서 일단 엘리사벳에게로 가 보기로 했습니다. 가면 천사의 방문 사실에 대해 속 터놓고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미 임신한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니 곧 해산달이 가까워지면 거들 수 있는 일도 있을 것 같았으며, 그러는 동안에 자신에게 개입하신 하느님께서 부모님에게도 요셉에게도 알아서 이해와 믿음의 방법을 일러주시겠지 하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흘 길을 걸어서 방문한 엘리사벳은 단박에 마리아의 임신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가득 차서 외치듯이 인사말을 건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성모송으로 바치는 전반부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것이 행복하다는 인사말은 엘리사벳이 신심 깊은 유다인들의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드러내는 흔적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해방하는 파스카 메시지


뜻밖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했던 인사말을 들은 마리아도 화답하였습니다. 이 화답은 스바니야 예언서에서도 나오다시피 조상 대대로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간직해 오던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 그 메시아께서 새로운 파스카 해방을 이루어주시리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일종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언자 스바니야가 하느님의 딸이라고까지 부른 시온은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언덕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파스카의 계약이 맺어졌던 시나이 계약정신에 가장 투철하다는 명성으로 사울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다윗과 그의 왕조를 뜻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하는 내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천하고 굶주리던 사회적 약자들을 해방하는 파스카의 메시지였습니다.


당신 팔로 권능을 펼치시어


성모신심은 성체신심과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공적 신심입니다. 이 신심들이 하도 개인주의적 성향에 매몰되어 버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잊어버리고 있지만, 원래는 파스카의 역사적 과업을 상기시켜주는 가톨릭교회의 보화이며 유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일에 맞추어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파스카 정신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배려하셨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성모찬송으로써 그 누구보다도 이 파스카 정신의 계승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세와 현대의 역대 교황들이 이 파스카 정신을 계승하는 뜻에서 반포한 사회회칙들에는 성체신심의 파스카적 의미를 반영하고 있고 그 결론에 가서는 반드시 성모신심의 표현으로 마무리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묵주기도를 할 때마다 환희의 신비 제2단에서 묵상하곤 하는 이 방문의 신비를 샤를르 드 푸꼬는 이 파스카 정신을 알지 못하는 이슬람 신자들, 그것도 가장 가난한 무슬림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더 가난하게 삶으로써 드러내고자 했으며, 이로써 하느님을 드러내고 파스카 정신을 실천하며, 진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마치고 반포한 「민족들의 발전」 회칙에서 이 샤를르 드 푸꼬를 만인의 형제라고 부르면서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신 바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찬송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당신 팔로 권능을 펼치시어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해방의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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