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화요일 : 2코린 8,1-9; 마태 5,43-48
오늘 우리는 산상설교의 가르침 중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다,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랑하려고 마음을 먹다가도 그 원수가 가한 상처나 입힌 피해를 떠올리고는 거의 자동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바람에 주저앉아버리곤 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상처를 받고 나서도 그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과거의 상처가 우리 두뇌의 기억세포에서 소환되기 때문에, 그만큼 원수를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나오게 된 삶의 자리를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원수도 있었고 박해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성전 권력을 장악하고 백성을 억누르던 사두가이들, 율법 지식을 내세워 백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미워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방해했으며 끝내 죽이기로 작정하고는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살펴보면 오늘 말씀의 실천적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이들과 적대적으로 처신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전만 하더라도 그분은 열두 살 이후 매년 순례하시면서 성전에서 기도하셨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율법도 아버지 요셉에게서도 배우셨지만 시편과 이사야 예언서는 줄줄이 외우실 정도로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십 주야에 걸친 단식을 마치고 돌아오신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성경을 봉독하실 때 메시아의 사명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의도적으로 골라서 읽으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온 몸에서 피가 흘러 빠져나가고 머리가 가슴을 압박하여 호흡이 서서히 곤란해지는 단발마적인 고통 속에서도 시 22편을 암송하며 숨지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원수 사랑’은 그가 원수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죄악을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두가이들이 성전을 장악한 권력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해석권을 내세워 백성을 정신적으로 억누르는 죄악을 멈추지 않자 이들의 죄악을 비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역시 이들의 죄악을 비판하시던 논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의 음모로 죽임을 당하셔야 했지만, 원수 같은 이들에게 당신이 견지하셨던 입장을 후퇴시키신 적은 없었습니다. 결국 원수 사랑은 그가 원수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죄악을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회를 주는 결정적 징표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직후에 쇠조각처럼 두텁고 단단했던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가 된 제자들은 이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과 다시 한번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들을 박해하려던 이들도 있었고 바오로처럼 이들 중에 회개하고 복음선포 대열에 합류한 이들도 생겨났습니다. 특히 회개하고 선교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바오로가 기근에 처해 궁핍하게 된 예루살렘 교회의 교우들을 위해 코린토 교회의 교우들에게 가서 모금을 하면서까지 돕는 오늘 독서의 말씀은,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이나 박해자를 위한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서 나오는 가치를 유보하거나 양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원수나 박해자들이 회개하고 저질러오던 죄악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고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벌조차도 그들로 하여금 죄악에서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를 정서적으로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원수를 대하라는 뜻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