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이기상 교수님의 글 [신의 숨결] 연재를 시작합니다.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을 담은 글로,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 연재합니다. 이기상 교수님은 독일 본토에서 하이데거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우리사상연구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며 문화와 생명을 화두로 시대의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사회에서 다시 신의 숨결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가톨릭프레스>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이기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신자본주의’의 경제논리
세계적 신학자로 인정받는 한스 큉(Hans Küng)은 그의 책 『세계윤리구상』(분도출판사)에서 전 세계를 휩쓴 근대화라는 서구화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학문은 있으나 지혜는 없다. 기술은 있으나 정신적 에너지는 없다. 공업은 있으나 생태학은 없다. 민주주의는 있으나 윤리는 없다.”
한스 큉은 이것이 바로 근대 계몽주의적 이성의 실체라고 지적한다. 항상 자신을 절대화시키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도록 강요하는 이성은 어떠한 우주와도 매여 있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신성시하지 않으며, 끝내는 자기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그 결과가 환경오염, 생태계파괴, 생명경시, 사회적 불안이라는 것이다.⑴
“부자가 되어라, 빚내고 쓰고 즐겨라!”(Get rich, borrow, spend and enjoy!)라는 월가의 신자본주의의 강령은 바야흐로 99%의 평범한 시민들의 분노를 사서 그들로 하여금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월가의 똑똑한 경제학자들은 국제적인 대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어야 그 혜택이 밑바닥까지 내려가 서민들도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소위 샴페인 잔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 피라미드식으로 쌓은 샴페인 잔의 맨 위에 샴페인을 부으면 그 잔이 넘치면서 차례로 아래의 잔들을 채워 밑에까지 흘러넘친다고.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밑의 잔에는 아무런 기별이 오지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위의 잔들을 계속 크게 만들어서 샴페인이 밑에 오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는 미국의 유명한 생태학자인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의 ‘구명보트윤리’라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상황을 구명정에 비유한다. 선진국이 적정 수용인원을 태운 구명보트라면, 후진국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서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구명보트다. 후진국의 국민들은 배에서 내려 헤엄쳐 선진국의 구명보트에 올라타기를 희망하지만 하딘은 이들을 배에 태워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만약 그들을 태운다면 선진국의 구명보트도 과잉 승선으로 인하여 가라앉을 것이니 그들만이라도 살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딘은 제3세계에 대한 식량 원조를 동결하고 이민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와 신자본주의의 속셈을 보여주는 이론이며 학설이다.
이처럼 서양 사람들의 경제논리는 한마디로 ‘나 살고 너 죽고’의 논리다. 그들은 허울 좋게 “소비는 미덕이다”라고 외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서 필요 없는 물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구입하도록 조장해야 한다. 이것이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산과 소비구조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우리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밟고 올라가려고 한다. 여기에는 살림의 논리, 상생(相生, 서로 살림)의 논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영적 사막화 현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대응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우리 시대의 징표를 읽고 교황 즉위 미사 강론에서 가톨릭교회가 나아갈 길을 찾는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영적 ‘사막화’가 심화되었습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요. (…) 오늘 우리는 불행하게도 매일 우리 주위에서 하느님 없는 세상을 봅니다. 공허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광야, 이 공허함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 다시 새롭게 믿음의 기쁨과 모든 인류에게 필요한 신앙의 절대적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II, 79/80)⑵
프란치스코 교황은 쾌락주의적이고 소비중심적이며 자기도취적인 문화가 그리스도교에도 침투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런 문화가 가톨릭 신자들을 물들여,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인 삶을 경시하고 이교도적으로 행동하며 세속적으로 변해가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가 약화된다.(IV, 304)⑶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문화를 주도하고 있지 않다. 세속주의가 세계문화를 지배하고 있다.(III, 131)⑷ 우리는 매일 이 세상의 권력가들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쫓아내고 그분 대신 유행이란 우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경험하며 산다. 또한 우리는, 성부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업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풍요로운 삶이 소위 ‘죽음의 문화’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고 있다. 더 나아가 잘못된 정보와 중상모략, 비방으로 교회의 이미지가 얼마나 손상되고 왜곡되어 가는지 본다. 우리의 아이들은 대중 매체 속에서 점점 윤리 의식을 잃어 가고 있다. 대중 매체에서는 성스러움을 중요한 소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과연 누가 이런 세속화된 경향에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1, 22/3)⑸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세계[지구]화 과정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율배반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 성장과 이에 대한 지지가 국가적 차원에서 대부분의 삶의 영역을 독점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 대부분은, 자존감은 물론 존재의 보다 깊은 의미, 곧 인간성과 보다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I, 31)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한계와 좌절에 직면하게 되면 단지 원칙만을 제시하며 실제적인 해결보다 형식적인 틀이 지닌 우위성만 강조하는 윤리주의에 머물거나 미지근한 태도로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는 데 급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쁜 것은 함께 짊어져야 할 공동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불신만 키우고 소비하는 데만 푹 빠져서 ‘오직 순간을 살고자 하는 모습’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다.(I, 32)
이렇게 인간의 정신적인 면, 윤리도덕적인 면, 영적인 면을 도외시하고 물질적인 것에 빠져 자기도취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이득과 쾌락만을 챙기는 현상이 영적인 세속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저는 세상이 자아도취와 소비지상주의, 쾌락주의에 빠져 있다고 확신합니다.”(IV, 94)고 말한다.
영적 세속성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 중심적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 그리고 사실상 인간에게 더욱더 적대적인 ― 아주 미묘한 인본주의와 하나 다를 바 없다. 이런 태도는 수많은 핑계를 대며 우리 안에 똬리를 들 수 있다.(드뤼박) 만일 사제가 이런 세속적 경향과 거래한다면, 그는 국가의 성직자나 공무원이기는 하되 하느님 백성의 목자가 될 수 없다.(I, 188) 영적 세속화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게서 보았던 행위이다. ‘너희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너희끼리 서로서로 높이고 있구나.’(II, 73)
그런데 가톨릭교회도 이런 영적 세속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교회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는 병든 교회의 영성은 피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와 같이 되면 염증이 날 것입니다. 거리로 나서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그러하듯 사고의 위험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교회가 자기 내부에만 몰두하면 교회는 금세 쇠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입었지만 거리로 나가는 교회와 병들어 움츠리고 있는 교회를 두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분명히 앞의 경우를 택할 것입니다.”(III, 317)
2013년 7월 25일 리우데자네이루 제28회 세계 청년대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소년들에게 영적 세속화에 맞서 싸울 것을 권한다.
“오늘 우리는 진심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신뢰하는가? 우리 자신, 물질적인 것 혹은 예수님인가요?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유혹을 자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 우주의 축이라고 믿고, 우리 혼자 삶을 꾸려나간다고 믿습니다. 혹은 우리의 삶이 오직 소유, 재물, 권력이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 듯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분명히 소유, 재물, 권력은 일시적으로 행복하다는 환상적인 황홀감을 줄 수 있습니다만, 이것들이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만들고, 결코 만족할 수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충만한’ 것으로 끝나지만 성숙하지는 못됩니다. 젊은 사람들이 충만하지만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젊은이들은 다른 것에 의해 채워지지 않고 신앙으로 성숙되면서 강해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로 여러분의 삶을 무장하면서 그분을 신뢰하면, 여러분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III, 373/4)
허무주의의 표징
현대는 ‘존재하는 것[존재자]’에만 파묻혀 무(無)[없음, 없는 것]를 망각한 현대인들이 ‘무의 망령’에 의해 시달리는 시대이다. 백 년 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현대의 이와 같은 상황을 예언하였다. 그때 그는 앞으로 2백 년 동안 허무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그리고 세계를 덮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200년의 역사이다. 내가 서술하는 것은 도래하는 것, 더 이상 다르게 다가올 수 없는 것, 즉 허무주의의 도래다. 이 역사는 지금 미리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성마저도 여기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래는 이미 100개의 징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운명은 어디에서나 자신을 예고하고 있다.”(니체, 『유고』)
니체는 모든 것들의 창조자로서의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신의 죽음은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잃어버렸음을 뜻한다. 신이 죽음으로써 신에 의해 세워진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허무주의이다. 니체는 이러한 “없음의 경험”을 견뎌내라고, 아니 극복하라고 촉구한다. 니체는 자신의 초인이 이러한 “없음”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통해 허무주의를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들을 근대적 전체주의로 몰아넣고 말았고, 이 전체주의는 인간적인 것의 대파국이 되고 말았다. 결국 허무주의는 극복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허무주의는 독일어 ‘니힐리스무스 Nihilismus’로 표기되는데 어떤 경우 번역을 않고 ‘니힐리즘’이라고도 부른다. ‘니힐 Nihil’은 라틴어로서 “아무것도 없음”, “무(無)”를 뜻한다. 허무주의는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다,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의미 부재를 주장하는 철학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의미나 목적, 목표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인간의 정신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진리, 도덕, 윤리, 종교마저도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정신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얘기하는 것과 그 주장에서 귀결되어 나오는 것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이미 말했듯이 첫 번째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다,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란 없다’라고 하는 주장이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다. 다음 진리와 관련하여 ‘진리도 없다’고 얘기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 그것은 알고 보면 거짓이고, 속임수고 눈가리개일 뿐이다. 뭔가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획득하기 위해 진리라는 포장을 했을 뿐이다. 그 다음 ‘도덕도 윤리도 없다’. 도덕, 윤리도 강한 자들이 약자들을 쉽게 지배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수준 높은 통치수단일 뿐이다. 그 다음 ‘종교도 없다. 종교라는 것도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민중들을 호리는 환각제일 뿐이다’. 그 귀결은 “신은 죽었다”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라는 것은 죽은 신의 무덤 위에 지은 건축물일 뿐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가치란 없다’. 정신적인 가치라는 것도 육체적인 욕망을 다스리고 인간의 노동력을 극대화시켜 이용하려고 만들어낸 허구이며 지배계층의 술수다. 곧 육체적인 욕망에 대한 왜곡된 시련이다. 육체적인 욕망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육체적인 욕망억제에 대한 보상감을 주는 대리만족 장치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현존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살고자 하는 ‘의욕’뿐이다. 그러니까 육체적 욕망의 극대화, 이것이 허무주의를 살아가는 삶의 요령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추구해야 할 것은 최대의 쾌락이며, 그것이 곧 최대의 행복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등장되는 말들은 쾌락, 도취, 희열, 열광, 오르가즘, 엑스타지, 니르바나, 트랑스, 광기, 폭력, 마약, 온갖 중독 등이다. 최대의 쾌락을 누리는 것, 그것이 최고로 행복한 상태이고, 몸을 중심으로 하여 얻을 수 있는 온갖 쾌락, 그것이 바로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의미의 물음이나 이성적인 돌파구를 찾는다고 할 때 해결책은 딱 한 가지, 즉 ‘자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한다면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다. 합리적으로 의미 있게 모든 일을 처리하기를 바란다면 길은 오직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의미 없는 모든 것들로부터 ‘의미 있게’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죽음의 미학’, ‘자살의 미학’이 태동되어 나온다. 유명한 실존철학자 까뮈도 이렇게 얘기했다. 부조리한 삶, 그것에 대한 철학적인 귀결은 자살이라고. 부조리한 삶에 이성적인 반성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해결 방식은 자살뿐이다.
한국 사회 깊숙이 만연된 허무주의
2014년 2월, 가난에 쪼들리고 병에 시달리며 버텨오던 서울 송파의 세 모녀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집세를 남겨놓았다는 사실이 남아있는 사람들을 퀭한 먹먹함에 빠지게 했다. 이를 본받기라도 하듯이 뒤이어 경기 광주에서 엄마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투신해서 모자가 죽고 딸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울 화곡동에서는 간암을 앓던 택시기사가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 동두천에서도 생활고를 못 견뎌 30대 엄마가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이 모든 사건들이 한 달도 안 되는 때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다.
요즘은 뉴스 보는 게 두렵다. 재산, 돈 문제로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들이 보도되는가 하면, 부모가 자식들을 죽이는 사건도 전해진다. 경제적인 이유 또는 가정적인 이유로 자식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모와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식들도 있다. 우리는 진작부터 ‘자살공화국’이라는 자조어린 자책을 해왔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은 세계 1위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자살률은 28.1명으로 지난 20년 새 3배로 늘었다 한다. 특히 심각한 것은 청소년과 노인 자살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신병과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단위 동반자살까지 수치를 증가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켕(Emile Durkheim, 1858~1917)은 자살의 유형을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등 3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서 개인적인 자살동기보다는 자살이 일어나는 사회적 상황을 중요시했다. 뒤르켕은 자살의 한 요인으로 아노미(anomie) 현상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노미는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를 말한다. 이런 사회병리가 노이로제, 비행, 범죄, 자살 같은 사회 부적응 현상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조선시대의 윤리규범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다. 능률과 성과를 앞세워 경쟁시장에서 효율성의 극대화를 추구해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이념을 앞세운 경제이론이다.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나라에 속한다. 경쟁에 살아남는 사람은 잘 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장과 성과의 그늘 아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왜 이렇게 극단의 선택을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는 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가족 구성원을 묶고 있던 끈끈한 유대감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다. 사랑, 믿음, 아낌, 이해, 희생과 같은 덕목들이 뜨거운 황금만능주의의 햇살 아래 아침안개처럼 빠르게 증발되고 있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사회풍조가 인간성을 메마르게 만들고 있다.
▶ 다음 편에서는 ‘존재론적 불안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참조 한스 큉, 『세계윤리구상』, 안명옥 옮김, 분도출판사, 1992.
⑵ 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강선남 옮김, 성바오로, 2014. [II]
⑶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아브라함 스코르카, 『천국과 지상』, 옮긴이 강신규, 율리시즈, 2013. [IV]
⑷ 매튜 번슨, 『교황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 제병영 옮김, 하양인, 2013. [III]
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프란치스코. 한 사목자의 성찰. 자비』, 윤주현 옮김, 생활성서, 2014. [I]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