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에서 무(無)로 돌아가는 존재,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도 아니며,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도 아니다.”⑴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탄생 이전에 거기에 없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는 더 이상 거기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 우리의 존재[있음]는 탄생 이전의 무[없었음]와 죽음 이후의 무[없어질 것임]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 존재를 감싸고 있는 이 무(無)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런데 이 무는 과연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가?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아무 의미도 없음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 내가 캄캄한 방안에 들어선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 경우 나는, 그 방안이 텅 비어 있는지 아니면 비어 있지 않은지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경험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 한다’라는 말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중성 때문에, 그래서 그 사태에 대해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무(無)가 우리 존재에 속하지 않아 그것이 존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위협하는 비-존재[무]가 무서워 도망가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존재한다[현존재]’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며 대단한 관심사이다. 우리의 존재는 단순히 확정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살아 있는 현존재[거기에-있음]에서 ‘현존재[거기에-있음] 자체’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내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더 근본적으로 제기하면 이렇다. 우리 인간들이 함께 거기에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분명 거기에는 일종의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연대성이 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일은 오직 나만을 위한 물음이 아니다. 나의 의문은 동시에 나의 모든 동료인간들의 이름으로 제기해야 한다. 의미물음에서의 이러한 보편 인간적 연대성이 인간 윤리의식의 근본 구성요소다.
개인 존재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동시에 발현되는 보편 인간적 연대성에서부터 인간의 그 모든 기획과 희망과 요구들이 발원해 나온다. 바로 이 물음이 모든 인간적, 사회적, 공동체적, 문화적 노력의 원동력이 되고 이 모든 노력들은 그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날 때마다 궤도에 올려지는 것이다.
우리의 거기에-있음[현존재]은 그 자체로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 이때 그를 위해 어떤 추가적이고 명확한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현존재는 이러한 전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이렇게 몸으로 살고 있는 의미전제가 그것에 대한 해석보다 앞서며, 그것이 사라짐과 더불어 현존재수행의 가능성 자체도 사라져버릴 정도로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몸으로 살고 있는 현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일은 각기 그때마다 현존재를 만족스러운 형태로 기획해내고 그것이 인간적 현존재를 충족된 형태로 몰고 간다. 의미를 찾는 일은 구체적으로 도달될 수 있는 충족되는 목표를 먹고산다.
현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일과 구체적인 의문들은 나와 같이 몸으로 살고 있는 동료 인간들 가운데에서 비로소 그 실제적인 힘을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에 직면할 때, 또는 다른 사람들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구체적으로 투신할 때, 현존재의 의미는 자명한 것이 되며 강력함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의미가 없을 수 없으며, 없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동료 인간적 영역 안에서 비로소 자신의 고유한 차원을 온전하게 펼쳐 보인다.
우리는 인간적, 동료 인간적 현존재의 의미요청과 절대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 의미요청은 ― 그것이 오직 충분히 구체적으로 주목될 때에만 ―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윤리적인 근본요청이 된다. 이 요청은 윤리적인 근본결단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과 악의 구별을 포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이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포기될 수 없는 윤리적인 근본요청을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무의미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여 타당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불안은 인간 내면에 깃든 하느님의 숨결이다
유명한 교부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우리는 하느님을 보려고 하느님을 찾는다. 그리고 하느님을 보았기에 하느님을 찾는다”고 말하였다.(아우구스티누스)(IV, 40) 그런가 하면 현대의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존재론적 불안을 완화시키기 위해 우리에게는 신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프로이트)(IV, 40)고 말한다. 영성적인 이유에서건 심리적인 이유에서건 인간의 본성에는 불안이 내재하며 이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요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나니, 우리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쉬지 못하나이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쉬지 못한다’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불안을 우리 내면에 깃든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이 우리에게 남긴 흔적이라고 표현한다.(IV, 292)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마음으로 당신을 느끼도록 만든다.(IV, 44)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마음에서 흘러나온 본능에 의한 충동적인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찾고 계신다.(IV, 22)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만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며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삶은 바로 예수 시대처럼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나자렛의 목수는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겉모습이 아닌 내면이 다른 이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첫 번째 사람들인 요한, 안드레아, 그리고 시몬은 매우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내면을 읽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 안에서는 놀라움이 용솟음쳤습니다. 이 경이로움은 바로 그분에게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이고, 다른 느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III, 347/8)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분을 만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증언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기 때문에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래서 예수는 가서 증언하라고 말씀하셨다.(III, 348)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전 안에서만 허용되는 종교, 그곳을 벗어난 바깥세상의 종교는 배제하는 신념은 설득력이 없다고 강조한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종교는 공동체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당신의 사람들과 가까이 계시고 함께 걷는 하느님, 윤리적이고 종교적이며 우정 어린 지침을 주심으로써 삶의 여정을 향상시키는 하느님임을 부각시킨다. 이때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공정함이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형제들에게 정의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때의 정의는 교육, 사회적 진보, 돌봄과 관심, 위안 등을 만들어내므로 매우 창의적인 정의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로운 종교 혹은 종교적 정의는 문화를 창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라는 요한 바오로 2세 말씀을 인용한다.(IV, 49)
교회의 복음화 과제에서 무엇이 우선인가? 여기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규정을 축소하거나 삭제하면서 이것저것 더 쉽게 만들려고 하지 말고,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찾고 그들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선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가 손실을 입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업무를 교구 일로 제한하고 공동체 안에 틀어박혀 살 때 독방에 감금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교회에 일어납니다. 곧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위축되는 것입니다. 또는 습기가 차서 곰팡이가 번진 아파트 벽처럼 쇠락하게 됩니다.”(II, 61/2) “우리는 발에 흙을 묻혀야 합니다.”(IV, 50)
▶ 다음 편에서는 ‘21세기 교회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Bernhard Welte, Religionsphilosophie, Freiburg Basel Wien 1978, “Zweites Kapitel, Gott als Prinzip der Religion”, 45 이하. (번역본: 『종교철학』, 오창선 옮김, 분도출판사, 1998.)
< 참고문헌 >
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강선남 옮김, 성바오로, 2014. [II]
매튜 번슨, 『교황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 제병영 옮김, 하양인, 2013. [III]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아브라함 스코르카, 『천국과 지상』, 옮긴이 강신규, 율리시즈, 2013. [IV]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