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데레사의 영성
이제 허무주의 시대에 영성의 불꽃을 지핀 하나의 사례로 마더 데레사를 살펴보자. 마더 데레사는 아시아적인 영성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그 방식대로 삶을 사신 분이다. 진리에도 여러 가지 양태와 등급이 있다.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규정은 달라진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하느님 존재증명의 길도 있는 것을 통해서 최고로 있는 것인 신을 증명해 내려고 한 것이다. 마더 데레사의 하느님은, 최고 꼭대기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없음 속에 텅 빈 채 있는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서의 절대자였다.
이렇게 달라진 하느님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우리는 최근의 신 존재증명의 방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학자인 한스 큉(Hans Küng),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베른하르트 벨테(Bernhard Welte)라는 이 두 사제는 신존재 증명을 과거의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였다. 한스 큉은 인간의 의미 경험을 통해, 다시 말해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통해 신존재 증명을 하였다. 벨테는 없음의 경험, 무의 경험을 통한 신존재 증명을 시도하였다.
이제 서양에서도 있는 것에 매달렸던 시각에서 벗어나 그 동안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없음 차원’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없음의 차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 바로 마더 데레사다. 하느님의 ‘없이 있음’에서 존재하는 것의 기본적이고 본래적인 있음의 방식을 경험하고 자기 자신도 하느님의 없이 계심과 같이 자신을 비워 없이 있게 하는, 비우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취했다. 가난 속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그런 삶을 살았다.
간디는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필요한 만큼만 서로 나눠 가지며 사용한다면 지구는 76억 인구에게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든다면 지구는 한없이 궁핍한 곳이다.
마더 데레사는 한마디로 “나눔 없이 평화 없다”고 하였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로서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향하는 데 장애물을 적게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⑵ 마더 데레사는 영성의 여섯 단계를 자신의 삶으로써 보여주었다. 그것은 침묵, 기도, 믿음, 사랑, 봉사(나눔), 평화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 : 비움 속에 하느님과 소통
첫 번째 단계를 침묵으로 한 것은 서양의 로고스 중심적인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그 분 자신으로 나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스스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며 텅 빈 공백임을 깨달을 때라고 말한다.⑶ 침묵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경청하면, 그때 침묵 속에서 주님이 말씀한다. 그러면 마음이 가득 차게 되고 우리의 입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고, 나는 조용히 경청해야 한다. 그리하면 나의 마음이 하느님과 사랑과 공감과 믿음으로 가득 차게 되어 내 입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⑷
마더 데레사는 현대인들이 갖가지 소리에 익숙해 있어서 침묵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도시에는 혼돈과 폭력, 분노, 좌절, 절규가 만연하고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 공허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 공허감을 먹을 것, 라디오, 텔레비전, 스마트폰 등으로 채우려 하고 분주한 외부 활동으로 피해 다니려 한다. 그러나 이런 공허감은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하느님께 시간을 내드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있는 것만으로도 쉽사리 해결될 수 있다.⑸
이렇게 마더 데레사는 침묵을 자기 영성의 첫 단계에 올려놓았다. 침묵 속에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께로 나아갈 때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네온다. 소란 속에서는 자기 자신마저도 잃어버리고 만다.
기도의 열매는 믿음 : 살림 자체[생명]이신 하느님 사랑
기도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게 할 때, 그래서 하느님이 말을 건네올 때 인간이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다. 기도는 침묵 속에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이 나를 통해 말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가 하느님의 입이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커 갈 것이다. 그래서 기도의 열매는 믿음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 그 생활은 하루를 살아가는 ‘하루살이의 삶’이 된다. 마더 데레사는 “어제는 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우리의 마지막 날인 듯이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⑹
마더 데레사는 “모든 것, 모든 움직임이 기도”라고 말하며 “기도는 모든 사물, 모든 행위 속에 존재한다”고 강조한다.⑺ 그러면서 자기만큼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이 필요한 이가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다. 때로 자기가 한없이 무력하고 약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기를 쓰신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에만 의존한다. 그리고 누구나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⑻
완벽한 기도는 많은 말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마음을 활짝 열고 싶은 갈망 속에 있다. 이렇게 마음과 가슴에서 나온 기도를 ‘마음의 기도’라고 부르며 이 마음의 기도는 단순함에 의해 자양분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눈과 입을 닫고 가슴을 여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로 하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마음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⑼
믿음의 열매는 사랑 : 사랑의 시작은 약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소통
마더 데레사는 몸과 오감을 비우고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 때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이 내게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도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고 다른 사람 안에도 계신 하느님을 보게 해달라는 청원이다.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열매는 다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갖는 사랑의 마음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오늘날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나병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원함 받지 못하고, 보살핌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 절망, 무기력 등 정신적인 병은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사랑을 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서구에서의 가난은 고독과 영적인 빈곤이라는 또 다른 형태를 띱니다.”⑽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무관심’이라는 정신적인 병을 더 걱정하며 서양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곳이지만 그곳에서의 가난은 고독과 영적인 빈곤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웃, 즉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멀리 퍼져나가야 한다.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 혹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의 운동은 대대적으로 벌여서 될 일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과 만나고 가까워져야 한다.
“사랑은 나누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대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사랑 자체를 위해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조건이나 기대 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⑾
사랑의 열매는 봉사(나눔) : 나눔과 섬김 속의 살림살이
이러한 사랑의 열매는 봉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나눔이다. 없이 계신 하느님을 본받아 나 자신을 비우고 그분의 뜻대로,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방식은 없이(가난하게)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 미소한 사람들인가?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굶주린 사람과 고독한 사람, 먹을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굶주린 사람. 목마르고 무지한 사람, 물만이 아니라 지식 · 평화 · 진리 · 정의 · 사랑에 목마른 사람. 헐벗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 옷만 없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은 사람, 태어나지 않은 아이, 버려진 사람, 인종차별을 당하는 사람, 떠돌아다니는 사람, 벽돌로 만든 집뿐만이 아니라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사람. 병자, 죽어가는 빈자, 갇힌 사람(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갇힌 사람), 삶의 희망과 신앙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 알코올중독자들과 마약중독자들 그리고 하느님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그들에게 하느님은 과거에 속한 분이지만 사실 하느님은 지금도 계시는 분이다), 또 성령의 힘 안에서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⑿
마더 데레사는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기도이고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마더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받을 만한 자격으로 한 가지 조건을 내거셨다고 말한다. “죽음의 순간에, 당신과 내가 누구였건 어디에 살았건 그리스도인이건 비그리스도인이건 똑같이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하느님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하느님의 실존 앞에 서서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했으며 무엇을 주었는지에 따라 판단 받는다”는 조건이다.⒀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인간성의 희망이라는 사실에 눈뜨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마더 데레사 영성의 정수를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기도이고 우리의 희망이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 부(富)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인간을 질식시킬 수 있다. 하느님조차도 이미 가득 차있는 가슴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넣어주실 수 없다. 부를 소유한 자에게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고 한 가지 사치는 또 다른 사치를 불러오기에 필요는 점점 더 커져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제할 수 없는 불만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실 수 있도록 가능한 텅 빈 채로 남아 있도록 하자고 마더 데레사는 촉구한다.⒁
마더 데레사는 가난이 곧 자유로움이라고 말한다. 가난은 나를 어떤 것에 붙들려 있게 하지 않으며, 나의 소유를 누구에게 주거나 나누는 데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혹독한 가난은 우리의 안전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가난은 진정한 복음적 가난이어야 한다. 온유하고 부드럽고 즐겁고 마음을 열어놓는, 항상 사랑을 표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복음적 가난이어야 한다. 가난은 포기가 아닌 사랑이다. 사랑하려면 주어야 한다. 주기 위해서는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⒂
봉사[나눔]의 열매는 평화 : 나눔 없이 평화 없다
마더 데레사는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라는 복음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으며 일생동안 그것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러한 사랑을 나누며 산다면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곧 나누어야 할 진리요 사랑이요 생명이다.
“사랑의 활동은 언제나 평화의 활동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줄 때마다 우리 스스로와 그 사람들에게 평화가 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화가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을 건드리는 방법이며 우리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부어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방법입니다.”(16)
마더 데레사는 사랑과 평화의 역사에 우리 각자는 단지 보잘것없는 도구일 뿐이니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자고 말한다. 전기제품을 분해해 보면 거기에 온갖 크고 작은 철사나 또는 굵고 가는 선이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곳에 전류가 흐르지 않는 한 기계는 작동하지 않고 빛이나 영상, 소리는 없다. 여기에서 철사와 선은 바로 인간들이며 전류는 주님이다. 우리는 전류가 우리를 통하여 지나가게 할 힘도 있고, 우리를 사용하여 세상에 빛을 내게 할 힘도 있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가 쓰이기를 거절함으로써 어둠이 세상을 덮도록 허용할 수도 있다.(17)
영성적으로 가장 가난한 이들 속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으려면 마음이 순수해야 한다고 마더 데레사는 말한다. 그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을수록 그 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 시중을 들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믿음과 헌신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마더 데레사는 그렇게 영성적으로 가장 가난한 이들 속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께 종사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나눔의 정신 속에서 깊은 감사와 존경으로 일을 해나갔다. 그 일이 불쾌하면 불쾌할수록 사랑의 효과와 유쾌한 종사는 점점 더 커진다고 생각하면서.(18)
마더 데레사는 다음과 같은 영적 유언을 남기셨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듯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이 있으면 하느님을 뵙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믿음이 깊어지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또 거기서 평화가 자랍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과 평화, 한마디로 모든 것을···.”(19)
▶ 다음 편에서는 ‘현대에서의 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 예를 들어 맞음의 진리, 참의 진리, 온의 진리, 비움의 진리, 비춤의 진리 등이 그것이다.
(2) 루신다 바디,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 황애경 옮김, 고려원 1996, 30.
(3) 마더 데레사,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지은정 옮김, 바오로딸, 1998, 17.
(4) 마더 데레사, 같은 책, 19.
(5) 루신다 바디,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 54/55.
(6) 앞의 같은 책, 83.
(7) 마더 데레사,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7.
(8) 같은 책, 9.
(9) 같은 책, 11∼13.
(10) 루신다 바디,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 87.
(11) 같은 책, 94.
(12) 루신다 바디,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 28/9.
(13) 마더 데레사,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31.
(14) 같은 책, 117.
(15) 같은 책, 121.
(16) 루신다 바디,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 177.
(17) 마더 데레사, 『이보다 더큰 사랑은 없다』, 69.
(18) 같은 책, 73 이하.
(19) 신흥범 엮음, 『마더 데레사. 그 사랑의 생애와 영혼의 메시지』, 두레, 1997, 221.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