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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부터 채우라는 자연의 이치는 교회에도 적용된다 - [이신부의 세·빛] 나자렛 선언과 가난한 이들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09-02 14:50:55
  • 수정 2019-09-02 14:5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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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월요일 : 1테살 4,13-18; 루카 4,16-30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가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면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옵니다. 높은 산에 떨어지든, 낮은 들판에 떨어지든 혹은 땅 속으로 스며들든지 간에 땅에 사는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적시고 나서는 낮은 데를 찾아 모입니다. 그래서 형성된 지형이 강입니다. 가장 낮은 곳은 바다입니다. 그런데 강에 모여 바다로 흘러갈 때까지 더 낮은 웅덩이가 있으면 그곳의 가장 깊은 곳부터 채우고 나서야 강물은 흘러갈 수 있습니다. 구름과 비, 강과 바다가 보여주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 땅에 내려오셔서 처음으로 천명하신 말씀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선언입니다. 


사십 주야에 걸친 단식 속에서 사탄과 맞서는 유혹을 견디신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자렛으로 금의환향하듯이 돌아오셔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게를 실어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이 찾아서 봉독하신 대목은 이사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동포들에게 선포한 예언이었습니다. 6백여 년 전에 다윗이 세웠던 이스라엘 왕국의 이상을 상기시킨 내용이었고, 그 이상은 그보다 250여 년 전에 모세가 시작했던 파스카 과업이었습니다.


파스카 과업을 이룩하기 위한 역사의 강물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한데로 모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깊이 움푹 패인 웅덩이들부터 채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늘에서 내린 비처럼 주님의 영이 내리신 말씀을 엄숙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의 처지와 삶이 그 역사의 웅덩이였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가 베풀어야 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해야 할 손님들이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제 강론으로 상기시켜드린 바도 있습니다만, 탈북자들, 조선족들, 고려인들, 재미와 재일동포들 그리고 이 땅에서 다른 나라로 입양된 이들과 다른 나라에서 이 땅으로 이주해 온 이들 모두는 역사의 강물이 흘러가다가 만난 웅덩이처럼, 정체성이 파이거나 상채기 났거나 채워져야 하는 이들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거나, 정신적으로 소외되었거나, 법적으로 신분이 불안한 이들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사랑과 손길이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천명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즉, 도처에 흩어져 사는 가난한 이들을 찾아 기쁜 소식을 전하셨으며, 바빌론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들에게 하느님 안에서의 해방을 체험시켜주셨고, 육신의 눈이 먼 이들도 보게 해 주셨지만 파스카 의식에 눈먼 이들이 눈도 뜨게 해주셨으며, 종교적이고 정치적이며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그 믿음으로 해방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기쁜 소식을 듣거나 눈을 뜨고, 해방을 체험한 이들 가운데에서 역사상 하느님 백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초대 교회 신자들이 다 그런 인연으로 맺어진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신 원칙이었고, 이 사명에 따라 그분이 행하신 활동은 교회가 시작된 뿌리가 되었으며, 후대의 교회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되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부터 채우라는 자연의 이치는 인류와 교회의 역사는 물론 인간 의식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공식입니다.


가난하거나 눈멀었거나, 잡혀갔거나 억압받는 이들의 의식은 그 딱한 처지 때문에 그늘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 의식의 깊숙한 그늘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어질 때 의식 전체가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로 복음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두고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알려주셨는데, 이는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요 믿어야 할 진리이며 계승해야 할 생명임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현세에서도 부활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강력하게 암시하신 말씀이라고 봅니다.


이 길과 이 진리와 이 생명을 살지 않는 이들은 살아있어도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기운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테살로니카의 그리스인들에게 사도 바오로가 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초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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