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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은 심약한 사람들의 도피처인가
  • 이기상
  • 등록 2019-09-09 10:39:53
  • 수정 2019-09-10 1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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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의 신에 대한 이야기



철두철미 세속화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21세기 최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화시대를 눈앞에 둔 우리에게 신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에 뒤떨어진, 덜 문명화된 인간들의 어리석음의 표지 아닌가? 모든 것이 과학에 의해 투명하게 설명되고 유지되고 있는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 과연 신이 설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신에 대한 이야기는 계몽의 추세가 현대에서 마지막으로 쓸어내야 할 어두운 구시대의 마지막 찌꺼기 아닌가? 신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세상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는 심약한 사람들의 도피처 아닌가? 벨테(Bernhard Welte)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철저하게 세속화된 세계에서 신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철두철미 세속화된 현대의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식에게 신은 불필요한 가설처럼 보일 뿐이다. 완벽한 합리적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의 관료화된 세계의 대관료체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는 듯하다. 근대의 계몽은 지나간 종교의 역사를 극복된 선사(先史) 정도로 치부하여 뒤켠으로 치워버렸다. 신존재 증명에 대한 칸트 식의 비판은 오래 전부터 교양인의 일반적 교양물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체 현대 세계가 신에 이르는 길과 같은 것을 모르고 있는 듯 하며 또한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는 듯 하다.” 


근대화의 추세는 종교개혁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계몽운동과 그 맥을 같이한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다. 종교적 내지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인간의 생활세계를 고루 통제하여 모든 영역을 통합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통일적인 세계관이 종교개혁 이후 무너지기 시작하며 세계가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을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제일원인이자 창조주로서 보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이제 그 자리를 이성적 세계관에 내주어야 했다. 신은 이성에 의해서 세계가 다스려지도록 창조했고 인간에게 이성적 능력을 부여해줌으로써 인간이 세계를 관장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것이다. 신은 역사의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고 이제부터는 인간이 이성으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고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의 세속화는 시작되었고 신은 점차 인간들의 일상생활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계몽운동이 모든 분야로 확산되어 가면 갈수록 신 내지는 신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신적인 것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않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일 뿐 아니라, 더 이상 도덕규범의 근거로서 기능하지 않게 되었고, 심미학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예술의 영역에서도 설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개인적 내지는 사적인 믿음의 영역에서만이 영향력을 펼 수 있었던 신이지만, 종교 자체를 사회적 현상의 하나로 설명해 버리려는 계몽의 추세에 밀려 신은 안방에서마저도 쫓겨날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계몽화의 과정을 꿰뚫어 본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종말을 앞서 예견했던 것이다.


서구 근대화운동의 고속도로를 깔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신 내지는 신적인 것을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몰아내야 했다. 


신에 대한 요청을 감안한다 해도 그것을 극도로 제한하여 인간의 개인적인 사적 차원에 국한시켰으며, 그래서 현실을 설명하고 통제하는 데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모든 존재영역을 관장하던 신적인 것이 이제는 종교적 영역이라는 극히 제한된 현실영역을 일부 필요로 하는 심약한 사람들을 위해 용인되고 있는 셈이다. 


이미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지 않았던가.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신이 죽은 이래 이 지상에서 이제는 인간을 규제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과 척도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야말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이며 이성중심주의적인 추세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인간적인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감행한 신적인 것의 퇴치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죽어버린> 신을 어떻게 되살릴 것이냐? <떠나버린> 신을 어떻게 다시 모셔올 것이냐? 어떻게 새로운 신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냐? 하이데거는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칠흑 같은 이 어둠 속에서 구원해줄 신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성스러움>의 영역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충고한다. 신은 오직 성스러운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데, 세속화 이래 인간 욕망의 불빛이 모든 곳을 두루 비추고 통제하고 있는 한 우리는 어디에서건 신을 대할 수 없다. 


정말로 우리는 세속화된 세계에서 신을 만날 수 있는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는가? 먼저 ‘세속화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살펴보자.


세속화된 세계에 떠도는 무의 망령


▲ (사진출처=techvshuman)


우리의 일상은 기술과 과학에 의해 철두철미 통제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컴퓨터에 의존하고 있으며 더위를 식히려고 선풍기를 틀어놓고 책을 읽기 위해 탁상 전등을 켜놓고 있다. 수시로 전화로 외부와 연락하며 필요에 대기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문명의 편의를 우리는 과학에 힘입고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니 이제는 과학에 우리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몽땅 맡겨야 할 판국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를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과학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생활세계는 철저히 과학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다. 


그런데 과학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존재자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과학적 태도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한다.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로지 존재자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존재자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존재자일 뿐 그것을 넘어선 아무것도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자가 아닌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이냐고. 여기에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존재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일 테니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제외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말도 할 수 없고 경험도 할 수 없을 것 아닌가. 그러니 엄밀함과 정확함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이 ‘존재하는 것’만을 다루는 것은 당연하고 과학에 걸맞는 태도다.


그렇다면 방금 앞에서 쉽게 얘기한 <있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즉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는가? 무슨 황당한 질문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있음과 없음을 구별 못할 무식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오히려 화를 낼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먹고 즐기고 하는 그것들은 다 존재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존재의 기준은 내가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원자는, 전자는, 뉴트론은 없는 것인가? 수는? 생각은? 고민은? 역사는? 문화는? 시간과 공간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더 나아가 <신>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우리가 흔히 당연한 것으로, 누구나 다 아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있음>의 기준은 전혀 자명하지가 않다. 그리고 어떤 <있음>의 기준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있음의 기준마저도 과학에게 떠넘기고 과학이 결정하는 대로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 한다. 그렇지만 과학은 그것을 결정할 자격도 권한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결정사항을 전혀 권한과 능력이 없는 과학에게 맡기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무(無)제거의 역사에서 최대 피해자는 신(神)


서양의 역사는 이렇게 있음의 기준을 정하고 없음을 그 있음의 울타리에서 몰아내고 경험과 서술의 테두리 밖으로 쫓아낸 ‘없음을 없앤’ <무 제거의 역사>였다. 없는 것은 이미 없는 것인데 그 없는 것을 어떻게 또 없애느냐고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 제거의 역사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신>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것이 몹시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과학적인 사유방식과 생활태도에 의해 일상세계에서 점차로 쫓겨난 신을 니체는 <신의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대는 존재하는 것에만 파묻혀 무를 망각한 현대인들이 ‘무의 망령’에 의해 시달리는 시대이다. 백여 년 전 니체는 현대의 이와 같은 상황을 예언했다. 그 때 그는 앞으로 2백 년 동안 허무주의라는 망령이 유럽을, 그리고 세계를 덮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존재자에만 매달려 모든 것을 존재자에 건 현대인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도대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끝없는 무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더 더욱 보이는 쾌락 사냥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는 <없음>이 단순한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고, 우리의 있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무기력한 없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그 모든 존재자와의 관계맺음이 다 없음의 바탕 위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이 없음으로부터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니체 이후 철학자들은 서서히 무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하이데거는 무를 ‘존재의 너울’이라고 이름하고 인간을 ‘무의 자리지기’라고 명명하면서 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의 마당을 열었다. 하이데거의 제자인 벨테는 스승의 이러한 사상을 한 단계 더욱 발전시켜 인간의 ‘무의 경험’을 거꾸로 ‘신 존재 증명’을 위한 받침대로 삼는다. 벨테의 이러한 사유의 단계를 차근차근 뒤밟아 보기로 하자.


▶ 다음 편에서는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Bernhard Welte, , Gottesbilder heute (오늘날의 신에 대한 그림들), S. Moser/E. Pilick 펴냄 (Königstein, 1979), 1.


<도래하는 신>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Heinrich Rombach, Der kommende Gott. Hermetik - eine neue Weltsicht (도래하는 신. 은닉 사건학 - 하나의 새로운 세계시야), Freiburg 1991. Manfred Frank, Der kommende Gott. Vorlesungen über die Neue Mythologie (도래하는 신. 새로운 신화학에 대한 강의), Frankfurt a.M. 1982.


이 말은 독일 슈피겔 잡지와의 대담 제목이기도 하다. 참조 M. Heidegger, , Antwort. Martin Heidegger im Gespräch (대답. 하이데거와의 대담), Pfullingen 1988, 99-100.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의 진리에서부터 비로소 성스러움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그리고 성스러움의 본질에서부터 비로소 신성(神性)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그리고 신성의 본질의 빛 안에서 비로소 <신(神)>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지칭해야 하는가가 사유되고 말해질 수 있다.” M. Heidegger, “Brief über den Humanismus (인문주의에 대한 서한)”, Wegmarken (사유의 이정표), 전집 제9권, Frankfurt a.M. 1976, 351.


마르틴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5, 65.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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