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에서 무엇이 가장 큰 걱정인가? 교회권위주의와 성직자권위주의로 드러나는 권위주의에서 그 걱정이 생긴다고 나는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폈으니, 이제 왜 걱정인지 따질 시점이다.
권위주의는 자신의 힘을 드러내려 하며, 그 힘은 권력과 돈으로 우선 나타난다. 권위주의 있는 곳에 돈과 권력이 모인다. 돈과 권력이 없는 권위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가 가난해지면 종교의 권위주의도 누그러진다. 권위주의를 고치는 약은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 해답이라니, 의아할 수 있겠다. 모두 돈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서 가난이 답이라니, 엉뚱하지 않은가. 사실 지금 모든 종교의 숨은 신은 돈 아닌가. 모든 종교의 감추어진 신은 돈이다.
불교의 숨은 신은 돈이요, 개신교의 숨은 신도 돈이요, 가톨릭의 숨은 신 역시 돈이다. 불교에서 붓다는 2인자다. 개신교에서 예수는 2인자다. 가톨릭에서 예수는 2인자에 불과하다. 돈은 모든 종교의 숨은 신이요 1인자다.
종교에 돈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라 돈이 많아서 걱정이다. 종교가 망하려면 종교에게 돈을 주면 된다. 성직자를 부패시키려면 성직자에게 돈을 주면 된다. 돈이 없어서 망한 종교는 인류 역사에 없었다. 가톨릭이 가난해서 문제가 아니라 부자여서 문제다.
‘그리스도교와 가난’이란 주제는 크게 두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1. 가난한 사람과 그리스도교의 관계 2. 그리스도교의 가난 문제. 또한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 가난은 돈 뿐 아니라 권력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며, 가난과 가난한 사람을 분리할 수 없고, 가난은 가치중립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논의에서 빠트릴 수 없다.
1. 가난한 사람과 그리스도교의 관계
신 존재증명, 삼위일체, 죽음 등 그리스도교가 다루는 중요한 주제가 많이 있다. 비중이 큰 여러 주제 중에 가난이란 주제가 정말 중요한가. 왜 중요한 주제인가.
예수는 죽음 이후의 문제나 죽음 자체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다. 성서 대부분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교는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전의 삶을 주로 다룬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을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삶을 다루는 종교다.
그런데 가난은 죽음 이전에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세계 지도를 보아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상대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예수가 전한 말씀과 행동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당되었다. 예수의 복음은 오직 가난한 사람에게만 전해졌다고 독일 성서학자 예레미아스는 말할 정도다.
20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공헌은 가난, 가난한 사람을 그리스도교의 핵심 주제로 복권시킨 데 있다. 더구나 오늘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인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 아무 응답도 하지 못하는 신학이나 종교를 어디다 쓸까.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고 가르치며. 그분이 예수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왜 부자로 태어나지 않고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을까. 하느님은 왜 가난한 사람을 하느님 자신의 몸으로 선택했을까.
하느님 특징 중 제일은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은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백성을 해방시키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였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예수라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을 편들어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였다. 가난한 사람들 밖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자리가 성서에 아예 없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랑할뿐더러,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서양 철학사와 신학 역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나 칸트 등에 의해 제시된 신 존재증명이 있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걸어 다니는 신이 소개되었다. 예수를 보면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그 예수는 가난한 사람으로 가난한 사람 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사회복지의 대상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윤리적 개념에 불과하지 않고 더 큰 신학적 가치를 지닌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식론적 계기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있는 예수를 그리스도교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난한 사람으로 있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놓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서 교회가 일어서느냐 넘어지느냐 결정 된다”는 해방신학자 소브리노의 말은 옳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가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교회가 넘어질 뿐더러, 하느님을 아는데 실패한다. 가난한 사람들 밖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알 방법이 없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면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이 존재하는 자리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자리다. 신약성서에서 신 존재증명은 따로 없다. 하느님이 이미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 안에 이미 있는 하느님을 두고 어디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말인가.
가난한 사람을 먼저 보고 그 다음 가난이라는 가치를 다루는 방식이 적절하다. 개념보다 사람이 먼저다.
2. 그리스도교의 가난 문제
하느님이 있는 곳을 알기 위해,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이 부자를 선택하지 않고 왜 가난한 사람을 선택했을까, 그것이 그야말로 신비다.
신비는 갈수록 모를 수수께끼가 아니라 알수록 더 고마움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는 존재 가치가 없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전제는 무엇일까. 가난한 사람을 선택한 예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는 종교인도 학자도 아니었다. 목수 출신 예수는 자영업자로서 비정규직 계절 실업자였다. 예수는 실업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당시 목수는 하층 직업은 아니고 중산층 전문직에 속했다. 예수는 중산층에서 하층으로 일종의 계급배신을 한 것이다. 체 게바라처럼 말이다.
돈이 무엇인지 예수는 모르지 않았다. 돈은 하느님과 맞설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예수는 일찍 알았다. 자신의 추종자들이 자신보다 돈을 더 좋아하게 될 줄은 그래서 염려하였다. ‘하느님과 돈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예수가 괜히 말한 것이 아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예수는 말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에 다니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힘들고 괴롭다.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은 그리스도교가 가난해지는 것이다. 가난한 교회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을 제대로 선택할 수도 없다. 부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거짓으로 선택할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자교회가 될 위험과 가능성이 가톨릭에서 가장 크다. 지금 가난하지 않은 그리스도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임무보다 부자와 정치권력과 갈등을 피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더 우선순위에 두었다. 교회조직 보호가 예수 메시지 추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교회 조직은 곧 교회 재산으로 동일시되었다. 똑똑한 신자를 기르는 교육보다 교회 재산 불리기에 더 신경 쓴 것이다.
부자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다 보면 가난한 교회로 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역사에서 계속 실패한 기록을 남겼다.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는 길보다 가난한 교회를 만드는 순서가 먼저다.
그리스도교는 사회개혁보다 자기개혁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자기개혁만 하여도 인류에 크게 공헌하는 것이다. 세상개혁을 외치다가 자기개혁도 제대로 못하고 쓸쓸하게 버림받는 그리스도교가 될 수도 있다.
3. 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무엇이 가난인지, 누가 가난한 사람인지 예수는 정의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유다인답게 예수는 개념 정의를 하지 않고 개념의 몇 사례를 들 뿐이다. 그래도 성서에 나오는 예를 어쩔 수 없이 분류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은 우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하루 두 끼 먹을 것이 없어 고통 받는 사람이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사람도 성서에서 가난한 사람에 속한다. 투표권, 결재권, 도장, 완장, 계급장이 없는 사람이다. 경제 정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돈은 좀 있어도 직업 탓에 인간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에 속했다. 매매춘 여성, 로마군대에서 일하는 유다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종교 규칙을 지키지 못한 탓에 종교에서 무시당하는 사람도 가난한 사람에 속했다. 십일조를 못내는 사람,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평신도는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에 속한다. 권력화 된 장로 계급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마태5,3) 구절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을 흐리는 용도로 잘못 해설되고 악용되기도 했다. 가난이란 주제를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하지 않는 주제로 취급하기도 했다.
가난이란 주제를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그 신학적 가치를 훼손하기도 했다. 모두 성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방해하려는 시도였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개념 정의 단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택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시도가 교회 내부에서 어용 신학자들에 의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누구인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먼저 윤리적 전제를 살펴야 한다. 논의하는 사람이 누구 편을 드는지 먼저 밝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학에 중립은 없다. “죽어가는 생명 앞에 중립은 없다.”(소브리노) 신학자는 부자 편을 들던지 가난한 사람을 편들던지 둘 중 하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동시에 편드는 종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부자를 비판하여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편들어 사랑한다. 그리스도교는 악의 세력에 저항하여 사랑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편들어 사랑한다.
“해방신학은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연구하는 학문이다.”(구티에레즈) 그래서 해방신학의 정당한 관심을 묵살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하느님을 무시하는 셈이다.
독일 레만추기경은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다. “해방신학을 비난하는 사람은, 비난하기 전에, 자신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4. 지금 그리스도교는 가난한가
지금 그리스도교는 가난하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을 선택하고 있지도 않다.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도 아니고 가난한 교회도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어를 빌면, 그리스도교는 악마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왜 그리스도교는 가난하지 않는가. 부자와 권력자에 의지하여 종교 조직의 안정을 꾀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부자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그리스도교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떤 성격의 정권과도 타협하고 협조할 준비를 그리스도교는 이미 해 놓고 있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가종교로 공인한 이후 그리스도교는 국가권력의 보를 받는 경험에 익숙하다. 프랑스혁명 이후 종교와 국가가 분리한 이후에도 그 향수를 잊지 못한다. 그 역사에서 그리스도교는 가난해본 경험이 없다.
모범으로 삼을 가난한 교회를 역사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에서 가난해본 적 없는 그리스도교가 가난한 교회가 되려고 한다니, 쉽지 않은 일이다. 가난으로 죽은 신자들은 많았지만, 굶어 죽은 성직자는 아직 없었다.
5.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있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벌써 그리스도교를 선택하였다. 특히 제3세계에서 그렇다. (아시아 대륙에서 불교나 이슬람에 희망을 거는 가난한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는데 계속 망설이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말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처신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를 1순위로 선택하여 왔다. 부자와 권력자들이 그리스도교에서 푸대접받은 역사가 한 번도 없었다.
교회는 정권이 아니라 백성과 상대해야 한다.(로메로 대주교) 교회는 제일 먼저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갈 길을 물어보아야 한다. 종교가, 교회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부자나 권력자나 신자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맨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6.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가난할 것인가
개신교와 가톨릭 내부의 사정과 관행이 다르지만, 둘 다 가난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교회의 재산을 크게 줄여야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현재 재산을 자진해서 90%를 줄이고 10%만 남기자고 나는 제안하고 싶다. 이것을 진짜 십일조라고 나는 명명하고 싶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진짜 십일조 아닌가.
그리스도교의 수입도 줄이고 지출도 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와 성직자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경제적 방식에 일대 회개가 필요하다. 지출에 따라 수입을 요구하지 말고, 수입에 따라 지출을 정해야 한다.
우선 수입을 줄여야 한다. 헌금 종류와 액수를 크게 줄여야 한다. 가난한 성도는 모든 헌금에서 면제되거나 크게 줄여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는 헌금을 교회는 받지 말고 돌려주어야 한다. 개신교는 십일조를 없애야 할 것이다. 십일조와 조찬기도회를 없앤다면, 사람들은 개신교를 눈 비비고 볼 것이며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출도 크게 줄여야 한다. 성당, 교회 신축은 자제해야 한다. 목사, 신부, 직원 생활비와 인건비를 크게 줄여야 한다. 목사, 신부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성지 개발은 크게 줄여야 한다. 가톨릭 주교들이 명심할 일이다. 가난하게 살 신념이나 자신이 없는 사람은 성직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계속해서도 안 된다. 성직이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직자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직자가 되면 안 된다. 성직자는 돈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거나 세례를 줄 때 절대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돈에 애착을 느끼는 사제는 용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2014. 11. 21 설교)
사림들이 그리스도교를 평가하는 제1 기준은 무엇일까. 무신론, 삼위일체, 이신칭의, 죄 문제 등 그리스도교 교리에 사람들은 먼저 귀 기울이는가. 아니면, 교회가 부자와 권력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선 지켜보고 있는가.
“가난한 자는 힘든 일을 하면서 박해를 받습니다. 부자는 정의를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갈채를 받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을 선택했듯이,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예수가 가난하게 살았듯이, 교회는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박해받지 않고,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도움 받고 특혜 받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아니다.“(로메로 대주교) 부자 교회는 박해받지 않지만, 가난한 교회는 박해받는다. 가난한 교회는 부자와 권력자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운명이다. 불의한 세력에 맞서 싸워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예수를 시조로 모시는 그리스도교가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이다. 그리스도교에 다른 길을 주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고 싶다. 부자들을 위한 부자교회는 악마의 유혹에 빠진 교회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정답이다. 진짜 그리스도교와 가짜 그리스도교는 여기서 결정된다. 다른 길은 없다.
가난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 여러 주제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 교리 면에서 사소한 주제로 외면받기 쉽지만, 실천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