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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 - [이신부의 세·빛] 육신이 죽기 전에 욕심을 미리 죽일 수 있다면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11-04 17:49:02
  • 수정 2019-11-06 16: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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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 로마 11,29-36; 루카 14,12-14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그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깊은 신심과 높은 학문으로 교회 개혁에 이바지한 밀라노 대주교로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노력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이러한 그의 공로는 오늘 복음 말씀을 제대로 실천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이 말씀은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백성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인물로 간주해서 초대하신 것임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뜻은, 사랑은 베푼 사람으로부터 다시 보답을 받으려고 주어서는 안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보답을 받기 위해서라도 사랑이 정작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보답할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몸소 보답해 주시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무상으로 어마어마한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삶을 시작한 우리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하느님의 뜻대로 베풀어져야 한다는 이치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셈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는 이 셈법에 따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도왔고, 또 교회 전체가 이 방식으로 복음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셈법으로 보면, 나에게 다시 보답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것은 손해를 보는 일이라서 자기 욕심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아깝고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육신이 죽기 전에 자기 욕심을 미리 죽일 수 있으면, 정작 우리 육신이 죽는 순간에 하느님 안에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욕심을 죽이고, 또 자존심도 죽여 가며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하면,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의인으로 부활하리라는 것을 도대체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첫째,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시 하느님께 갚아드린다는 지향으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베풀었을 때 우리 양심에 찾아오는 하느님의 위안과 기쁨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위안과 기쁨이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의 영적 거리를 좁혀주고 세상이 도저히 줄 수 없는 평정심과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화로 나타납니다. 


둘째, 이를 혹시 감지하게 된 주변 교우들과 이웃들이 보이는 반향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선행으로 평소의 삶을 가꾼 사람의 삶에서는 절대로 감출 수 없는 영적 향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향기를 눈치 챈 사람들 역시 향기를 좇아서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성사생활을 통해 힘을 얻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기복적 지향으로는 결코 성사를 배령하지 않지요. 첫째와 둘째의 표징의 자연스런 귀결은 성실하고 순수한 성사생활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성실하고 진실하게 성사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신자들을 정성스럽고 품위 있게 연도를 바쳐드리고 장례예식을 거행해 드림으로써 그 품위와 향기를 드러냅니다.


살아가는 동안 아무런 사랑의 실천도 없는 삶을 살다가 죽은 경우라면 부활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향기로운 삶을 살다가 죽은 경우라면, 약간의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평소의 성실한 성사생활로 다 깨끗하게 씻어졌을 것이고 마지막 고해성사가 포함된 병자성사로 확인되었을 것이기에 연옥 정화과정은 장례미사와 고별예식으로 끝나고 의인으로 부활하여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성사적 사죄권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의 사제가 장례미사 끝에 고인에게 천상낙원의 문을 열어달라고 바치는 고별기도가 이러합니다. 


“지극히 인자하신 아버지, 그리스도를 믿으며 세상을 떠난 교우 ○○○가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이 교우를 주님께 맡기나이다. 주님께서는 ○○○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고 저희에게는 주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보여주셨나이다. 주님, 저희 기도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주님의 종 ○○○에게 천상낙원의 문을 열어주시고 남아 있는 저희는 그리스도 안에 함께 모여 주님 앞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때까지 믿음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에 따라서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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