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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으로서의 비루함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사는 기쁨으로 - [이신부의 세·빛] 복음의 기쁨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11-12 17:40:18
  • 수정 2019-11-12 17: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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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지혜 2,23-3,9; 루카 17,7-10


▲ (사진출처=CNS photo/Vatican Media)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그분께서는 구원을 제안하시는데,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와 슬픔과 내적 공허함과 외로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만나러 다가오십니다. 그분을 만나서 그분과 함께 있는 기쁨은 우리 마음과 삶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 솟아납니다. 이 권고를 통해 저는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걸어가야 할 새 경로들을 제안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기쁨으로 두드러진 복음화의 새 국면을 시작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직에 오른 2013년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낸 사도적 권고를 시작하면서 한 말입니다. 그 제목이 ‘복음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교황’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원래는 마루 종(宗)자를 써서 교종(敎宗)이라고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천황을 높이면서 가톨릭교회의 교종을 법왕이라고 다소 낮추어 부르려고 하니까 임금 황(皇)자를 써서 ‘교황’으로 써 온 것이 굳어진 호칭입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관례와 그분께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호칭이기는 한데,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역대 교황들은 스스로 공식적으로 호칭하기를, 그냥 ‘로마 주교’라고 부르거나 ‘하느님의 종들 중의 종’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군주제도의 전통을 연상시키는 ‘교황’(敎皇)이라는 시대착오적 호칭보다는 주인을 섬기는 머슴을 뜻하는 따를 종(從)자를 써서 ‘교종’(敎從)이라고 불러드리는 것이 교회의 새로운 관례에도 맞고 그분의 성품과 처신에도 어울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해서 종의 처지와 심정으로 대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다소 야박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당신부터 하느님 앞에서 종처럼 처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라시는 일을 그분도 하셨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분도 전하셨으며, 하느님의 뜻이라면 당신의 뜻과 달라도 순명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겟세마니의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처럼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종 노릇을 자처하시며 모범을 보여주셨으니, 제자들은 물론 모든 믿는 이들도, 교황까지, 하느님의 종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도 강조하신 것은 종으로서의 비루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오늘 독서인 지혜서 2장에서도 상기시켜주는 바와 같이,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처럼 불멸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종처럼 처신해서라도 하느님의 속성과 역할과 처신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해서 종처럼 처신하셨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 주체성이요 순명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는 이 단순한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습이 마치 대단한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를 문명의 세속성 또는 현대판 우상숭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무릇 학문이 자율성을 추구하는 나머지 하느님의 창조와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목적 이성을 상실하고 도구적 이성만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리를 가릴 수 있습니다. 정치질서에서 국가안보를 자유와 평등과 연대 같은 최고선의 가치보다 높이면 독재정치가 생겨나서 공동선의 질서가 무너져서 평화가 깨질 수 있습니다. 경제질서에서 인간의 복지에 봉사하기보다 수익만을 추구하다 보면 양극화 현상이 초래되어 불평등이 심화됩니다. 


학문과 정치 경제 등 구조적인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개인들 안에서도 세속성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즉,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종교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광신자 집단을 혐오하는 나머지 신앙 자체를 외면하게 되면 각자의 양심에 따라서만 살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개인주의 성향은 사회악 현상에 대해서는 정당한 분노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정작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공동선 실천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도피성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고 교회 전통이 입증하는 건전한 신앙생활은 복음의 기쁨을 누리면서 책임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공동선에 대한 투철한 의식으로 사회악에 맞서는 사회의식인가 하면 올바른 가치를 실현하여 밝은 미래를 현재에 앞당기려는 역사의식이기도 합니다. 


세속적 태도로 인해 저질러지는 죄와 이 때문에 양심을 짓누르는 슬픔, 또 하느님 없이 홀로 살아가려는 태도에서 초래되는 내적 공허함과 외로움을 극복하고,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길은 단순합니다. 이 무신론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겪을 고난을 각오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우상숭배적 태도로 가하는 단련을 감수하더라도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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