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교황 프란치스코는 일본을 방문한다. 교황의 일정표가 언론에 공개되며 여러 가지 예측들과 움직임들이 나타난다. 이번 교황의 일본방문은 지난 2014년 무산된 초청 이후 일본의 아베 총리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다. 고노 외무상이 2018년 교황청을 직접 방문해 교황의 방일을 위한 전방위적인 노력과 준비를 해왔다. 일본은 동경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재건과 청정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실행을 추진하고 있다. 교황 마케팅은 일본이 당면한 문제에 좋은 탈출구를 내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한다.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일 이후 38년 만이다. 일본 외무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교황은 11월 24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지점 중심부에 건설된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방문하고 미사를 지낸 뒤 또 다른 피폭지인 히로시마를 찾아간다. 이튿날인 11월 25일에는 도쿄로 이동해 나루히토 일왕 및 아베 신조 총리와 만나고 자리를 옮겨 도쿄돔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교황은 핵무기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해왔다. 일본방문의 이유 역시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교황의 단일한 입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함이다. 교황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도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메시지를 내놓을 것으로 예측된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9월 13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교황의 방일에 대해 “국제평화를 추구하는 교황이 피폭지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피폭의 진상에 관해 정확히 알리는 것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속내를 비쳤다. ‘국제사회에 피폭의 진상에 대해 정확히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교황 마케팅’ 전략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15만에서 24만 6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실재 핵으로 인한 피해를 보았다. 핵무기가 개발된 이후 처음으로 핵의 공포를 체험한 나라가 일본이다. 그리고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핵 재난을 경험한 바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러시아의 체르노빌 참사 이후 가장 최근 핵의 위험을 체험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저지른 국제적 만행과 폭력, 대량인명 살상과 화학전 등의 끔찍한 상황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을 잊고 싶었고, 지우고 싶었고 왜곡하고 싶었다. 자신들의 역사에 이러한 국제사회의 불명예와 오욕의 역사를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731 부대의 생체실험장, 간도 대학살, 관동 대학살, 난징 대학살(35만), 뤼순 대학살(2만), 마닐라 대학살(10만), 밀리환초 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버마 대학살(100만 추산), 베허호 사건, 사이판 전투, 산다칸 죽음의 행진, 신멸작전, 싱가포르 화교 학살, 연해주 4월 참변, 우서 사건 등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학살과 강간, 폭력과 강제징용으로 야만의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방패삼아 국제적인 면죄부를 받으려는 의도는 참으로 개탄스럽다. 그나마도 일본의 대표적 군사도시였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강제동원 된 조선인이 많았고, 이 때문에 히로시마에서 3만 명, 나가사키에서 1만 명의 조선인이 피폭으로 숨졌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역사적 반성 없는 일본 전범들 앞에서 교황이 미사를 하는 장면이 세계인들의 TV를 통해 보여지고, 2020년 동경올림픽으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딛고 일어난 일본의 영광과 새로운 무장을 세계에 광고할 것이다. 지금 아베 내각이 죽기를 각오하고 추진하고 있는 것은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국가였던 일본이 다시 정상국가의 길, 자국의 보호를 위한 무장이 아니라 주변국을 비롯한 타국을 공격할 수 있는 전쟁이 가능한 법을 만들기 위해 온갖 음모와 술수를 쓰고 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지난 역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도 없고 더구나 자신들의 역사를 감추거나 왜곡하며 국제사회와 주변 피해 국가들의 공분과 원망을 사고 있다.
역사적 사죄나 반성 없는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는 교황의 방문과 특별미사는 일본정부의 정치적 야심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이용될 것이라 충분히 예상되기에 교황청은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이해를 수렴하여 일본방문을 기획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교황 일본방문의 마지막을 한국 비무장지대(DMZ), 임진각 평화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가톨릭교회의 세계평화를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을 세계인들에게 알리자는 서명운동이 진행되기도 했다.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일을 반대한 일본가톨릭
1980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일을 둘러싸고 일본 가톨릭교회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오히려 불교와 신도 측이 적극 찬성 환영하는 등 의외의 ‘종교전쟁’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당시에 주목을 끌었다(“교황의 방일은 천황주의를 공인하는 것” 일(日) 가톨릭 반대로, ”종교전쟁”, 중앙(80.03.29.)
당시 일본 가톨릭의 교황 방일 반대 이유는 로마교황청과 일본종교계가 가을에 공동 개최하는 ‘세계종교인 윤리회의’ 때문이었다. 일본 측 주최자들이 ‘천황주의’로 정신적 무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교황이 오는 것은 마치 일본 ‘천황주의’를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역할을 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세계종교인 윤리회의 일본 측 주최자이며 일본 종교 대표자 회의 사무총장인 소에지마·히로유끼 명치신궁 궁주는 직접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황을 알현하고 윤리회의 개최에 대한 소식을 알리자 당시 교황이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며, ‘가능하면 회의가 열릴 즈음 일본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교황방일을 반대하던 일본가톨릭 지도부는 일정부분 타격을 입는다.
교황의 방일을 추진하던 무리들은 “세계종교인 윤리회의는 편협한 어떤 특정종교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순수한 것이며 아무런 정치·사상적 배경이 없음”을 강조하며 일본 사회의 거센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일이 현실화 되면서 오히려 가톨릭교회의 신뢰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가 당시 2%대의 신자비율에서 10% 대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 나갈 즈음, 일본가톨릭은 이러한 종교논쟁으로 내부 역동성과 동력을 잃고 지금도 전 국민의 0.2%-0.3%의 저조한 선교율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일본의 선교부진의 이유가 단순히 교황 방일의 문제에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황의 일본천황 공인으로 비쳐진 당시의 방일 분위기에서 일본인들은 생각했다. 신토이즘적 사고에서는 가톨릭의 신(神)도 모든 신(神) 중의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했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정점에 ‘천황’이 있기에 그리스도교회의 ‘교황(敎皇)’ 역시 ‘천황(天皇)’의 통치 아래 놓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미 ‘천황’이라는 말 자체가 착시지만, ‘착시’된 ‘천황’에서 또 다른 ‘착시된 사유’의 다양한 연장을 가져온다.
일본인은 신토(sintoism)의 신(神)을 ‘카미’라고 부른다. 수많은 ‘카미’들의 기원은 주로 조령(祖靈), 즉 ‘조상신’이라 할 수 있다. 죽은 모든 이들이 조상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인들의 관념 아래서는 죽은 예수도 ‘카미’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일본의 신토이즘은 모든 신을 포괄하는 체계이다. 그러니 ‘예수’를 신으로 하는 그리스도교회 역시 ‘신토’의 하나일 뿐인 종교인 것이다.
카미는 선악의 구분을 넘어서 있다. 다시 말해 카미는 그리스도교의 유일신관에서 전제가 되어 있는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아닌, 도덕적인 선악을 따지지 않는 존재로 상정된다. 그러니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은 모두 ‘카미’들의 것으로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학살도 나쁜 ‘카미’들의 것이지만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가톨릭은 이러한 신토이즘의 종교적 혼합주의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의 혼돈을 걱정했던 것이다. 사실 조선후기 천주교가 전래되어 박해가 시작되었던 최초의 이유는 ‘조상제사’ 문제였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를 시작으로 조선에서는 1만여 명의 무명 순교자를 비롯하여 103위 124위 순교 성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오히려 신앙의 근본주의자들은 조상제사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박해와 죽음을 불러왔지만 이후 가톨릭교회 안에서 제사는 고유한 미풍양속으로 미사 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연도(연령을 위한 기도)로 토착화의 길을 걸었다.
교황 방문 앞두고 공개서한 발표한 일본 대주교
지난 9월 24일 일본가톨릭 도쿄대교구장을 지낸 타케오 오카다 명예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일을 앞두고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오카다 명예대주교는 서한에서 교황청이 토착화(Inculturation), 탈중앙화(decentralization), 영성화(Spiritualization)를 이뤄내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가톨릭프레스, 19,09,26). 오카다 주교는 먼저 가톨릭교회의 언어별 번역 및 전례 규칙 등을 관장하는 ‘경신성사성’의 과거지향적 태도를 비판했다. 소수의 일본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본 가톨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로마 중심의 보편 세계 교회 운영은 이제 지역교회의 자치권과 탈중앙화를 통해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보편적(가톨릭)인 믿음의 체계를 형성해(토착화)나가야 성공할 수 있고, 의미 있는 믿음의 체계가 될 수 있다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주교회의는 교황청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들의 가치체계를 중앙교회에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일본 나름의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천주교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가톨릭신문이 주최하고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주관한 ‘한·일 관계의 역사, 그리고 기억의 치유’ 제3회 국제학술대회(10월 9일,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 민족화해센터) 에서 기조 강연을 맡은 일본 삿포로 교구장 가쓰야 다이치 주교는 한일 관계가 격화된 뒤,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 시민들이 여러 가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음에도 이러한 사례들이 일본 매체를 통해 보도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가쓰야 주교는 “오히려 일방적으로 한국을 비난하는 보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건들만 보도되는 등, 정부와 미디어가 (한국을 비난하는) 국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하며 “한·일 갈등의 핵심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및 전쟁 책임에 대한 역사 인식이 있다”면서 “일부 일본 역사가들과 우익 그룹 역사 수정주의자의 의견이 마치 일본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인 듯 일본 사회에 퍼지고 있어 깊이 우려한다”고 말했다. (가톨릭프레스, 19.10.10, ‘치유’ 위해 한국과 일본가톨릭 주교 마주 앉아)
가쓰야 주교의 담화문이 일본 검색 사이트에 노출되자, 비난과 중상모략이 담긴 항의문이 빗발쳤으며 관련 글에는 악성 댓글이 달렸다. “중앙협의회에 항의 전화가 쇄도하고, 삿포로 교구 사무국에도 항의 전화, 편지, 이메일이 쏟아졌다”면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필자는 일본의 가쓰야 주교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는 일본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였다. 일본인들은 가쓰야 주교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그를 거슬러 온갖 사악한 말을 하고 있다. 삿포로 교구장과 타케오 오타카 대주교는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에, 일본국민들의 편향되고 잘못된 인식과 미디어의 불의한 행태에 모진 비난을 받으면서도 강력하게 대응하고 교회의 가르침과 사회교리를 전하고 있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고 행복한 주교들이다. 한국의 주교들은 지금 한일 간의 갈등국면과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를 향한 국민의 열망에 과연 어떻게 부응하고 있는가?
한국천주교회는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교회라는 ‘비판’ 아닌 ‘비난’을 받아오고 있다. 비난에는 대안이 없다. 비난에는 사랑이 없다. 비판은 사랑으로 대안을 가진 날 선 발언이다. 최근의 한국천주교회는 내부의 활력을 많이 잃어버리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외면하는 위기의 상황에 직면했다. 10년 전과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신학교에 들어오는 신학생들의 숫자가 급감하고, 교회는 대학과 병원사업, 노인 요양사업, 사회복지시설 운영 등으로 여러 가지 문제와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일들이 많아졌다. 사제들의 일탈과 수도자들의 세상과 괴리된 수도생활, 교회의 여성화, 보수화, 중산층화로 그 동안 교회 안에 기대어 있던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대학생회, 가톨릭청년회, JOC, 천주교도시빈민 선교회 등이 무력화되고, 교구별 정의평화위원회도 교회제도 안에서 생계를 보장 받다보니 교계제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반면, 가톨릭의사회, 가톨릭한의사회, 가톨릭법조인회, 가톨릭경찰교우회, 가톨릭공무원회 등 영향력 있는 사회의 권력기관들이나 유력인들의 모임은 골프장, 호텔 등에서 친목을 다지며 똘똘 뭉치고 있다.
이번 교황의 방일에 한국천주교 주교들이 일본 행사에 참석할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일본은 조선인들의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한국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며, ‘전쟁 성노예’는 없었다는 억지 주장을 전개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또한 의도적으로 경제적 무역마찰을 일으켜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일본 극우는 한국경제에 타격을 주려고 사방으로 노력했지만, 한국 국민들은 일본여행 자제, 일본 물건 사지 않기 등의 차분하고 강력한 대응으로 일본의 공세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천주교 주교들이 일본을 방문하고, 이러한 사정의 전후에 대한 일언반구(一言半句)없이 일본 정치에 들러리를 선다면 역사는 이것을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나가사키 평화순례단’을 모집하며 ‘그리스도의 평화’를 표방하는 한국평신도 운동을 무엇이라 평가하게 될까? 오히려 우리는 일본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 일본 주교들의 목소리는 지금 한국천주교회 주교들이 내야 할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행사를 주관한 의정부 교구의 교구장 이기헌 주교는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로 많은 고통과 상처를 입은 한국에 진실하게 그리고 정부가 바뀌더라도 역사수정 없는 사과를 해야 한다”면서 “독일 총리가 한 겸손하고 진실한 사과와 같은 사과를 해야 한다”고 발언하며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기헌 주교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역사 문제에 있다”면서 “역사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주교단의 교류에 따른 한·일 양국 시민, 종교인들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과는 별도로 식민 지배, 위안부, 강제징용, 관동대지진 대학살, 역사수정과 같은 사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주어야 비로소 교회의 본질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교세는 일본이 한국교회보다 부족할지 모르지만, 일본 천주교회의 수준은 한국천주교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 글은 <공동선> 2019년 11,12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