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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고통으로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기를 - [이신부의 세·빛] 잔치의 꿈
  • 이기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9-12-03 16:12:26
  • 수정 2019-12-03 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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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수요일 : 이사 25,6-10ㄱ; 마태 15,29-37


오늘 독서와 복음에 담긴 말씀의 빛은 ‘잔치’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베풀 잔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한 하느님의 잔치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들으러 모인 군중이 사흘 동안 굶게 되자 빵 일곱 개와 물고기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잔치는 모든 민족을 음식과 술로 배불리 먹이는 잔치이며, 죽음이나 슬픔이나 수치도 없애버린 잔치입니다. 고대인의 소박한 언어로 묘사된 이 메시아 잔치상은 인류 문명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풍요로우면서도 그 풍요로움을 고르게 누릴 수 있을 만큼 분배정의가 실현된 경제라는 목표나, 슬픔이나 수치가 사라진 현세의 삶을 누리는 목표는 삶의 질이 향상된 상태라는 목표쯤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겠으나, 죽음마저 사라진 상태는 현세의 문명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사야가 메시아께서 도래할 때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고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과연 그 목표를 성취하셨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수는 있습니다. 죽음을 없애기는커녕 예수님도 죽음을 당하셨는데도 이 물음이 과연 유효할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알아들을 것인가 하는 해석의 문제가 생깁니다. 


메시아께서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고 이사야가 예언한 죽음을,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차원의 죽음으로 이해하자면 틀린 것이고 또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든가 삶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든가 적어도 공포의 대상이라고 여겨온 세속적 죽음관을 예수님께서 극복하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써, 또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써 당신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또 이로써 죽음을 넘으셨습니다. 인생의 끝, 죄의 벌,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죽음을 그분은 사랑과 믿음으로 쳐부수셨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고, 우리는 그 부활을 전적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라야 우리는 그분의 삶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분은 공생활을 하시던 평소에도 부활한 삶을 사셨다는 깨달음이 그제서야 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살아 생전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은 또 그분의 삶을 죽어 부활한 삶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때는 물론이요 죽기 전에도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오늘 복음이 오늘 독서와 맺고 있는 관련성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분이 군중을 먹인 것은 배를 채우는 빵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었고, 인간됨이었으며, 믿음다운 믿음이었던 겁니다. 


▲ 지난 11월,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종교, 시민사회단체들이 톨게이트 노동자 전원의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오체투지를 함께 했다. ⓒ 강재선


그래서 그분은 이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직전에도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 말 못하는 이들 등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와주시려고 안간힘을 다하셨고, 다른 상황에서도 아들이 일찍 죽어 슬퍼하는 과부라든가 아들이 죽을 병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는 왕실 관리라든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간음의 죄를 짓고 사람들 앞에 끌려 나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여인이라든가 한 마디로 정신적 고통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위로하시느라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삶, 이러한 믿음의 삶이 살아서도 그에 필요한 노고와 희생 덕분에 죽어야 했던 삶이요, 사실은 바로 그 덕분에 그 의로운 희생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한 삶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에서 일어난 빵의 기적 사건을 바탕으로 세워진 성체성사의 목표가 이런 삶에 있습니다. 세속적인 삶에서 거룩하게 변화된 삶, 적어도 주일미사 참례라는 신앙생활의 기본을 목표로 바꿔치기 하지 않는 삶,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희생을 억울하다고 생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삶이 성체성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영성체를 할 때 ‘아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누구라도 굶주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르게 누구나 배고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래서 분배정의가 세워진 경제 질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가 내다본 세상은 바람직하고 또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삶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인간다움이란, 나의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그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이 없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그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반되기 마련이 나의 손해라든가 희생을 아까워하지 말고 기꺼이 하느님께 바쳐드리려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가 희망을 걸었던 메시아 시대는 오늘 여기서 이룩되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서 그 희망이 실현되어 갈 때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육신의 배고픔이나 질병과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이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일곱 바구니가 아니겠습니까? 이 일곱 바구니들이 상징하는 칠성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죽음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그분과 함께 죽음을 쳐없애고 부활하게 됨으로써 죽음 없는 세상에 참여하게 해 주는 기회요, 소외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해 주는 기회입니다. 


이 대림시기에 죽음을 영원히 없애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지향하는 믿음으로 성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사에 참여한 그 은총으로 지금 굶주리거나 노동의 고통으로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이들이 잔치처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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