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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함
  • 이기우
  • 등록 2019-12-20 16:12:42
  • 수정 2019-12-20 17: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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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간 토요일(2019.12.21) : 아가 2,8-14; 루카 1,39-45



임박한 주님의 성탄을 더욱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하는 이 대림 제3주간에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소명을 받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는 청빈의 교회를 거쳐, 이제 하느님의 선택에 순명하여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도록 파견하고 파견받는 사도적 교회의 길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자원하거나 또 자원한 선교사들과 연대해야 할 실천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는 이미 그렇게 하신 하느님의 선택을 본받고 순명하는 선택이고,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고 기운을 북돋아주시지 않으면 이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처지에서만 가능한 신앙의 일이요, 그분의 도구로서 살아갈 경우에만 체험할 수 있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뜻밖의 전갈을 받은 마리아는 그 즉시 길을 떠나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한낱 혼전임신이요 심지어 율법 위반으로 볼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같이 내밀한 일을 그 누구에게라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인들, 약혼자인들 그같이 전무후무한 하느님의 역사 개입을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이미 아이를 못 낳는 여자로 알려진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고 천사가 알려주었으니, 똑같이 주님의 섭리를 경험한 여자들끼리 영적이고 내밀한 대화가 가능하리라고 여기기도 했을 것이며, 또 석 달 후에 아기가 태어나면 시중을 들어주어야 할 일도 있으리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났겠지요. 


과연 이 두 여인은 각기 태중에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처지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오늘날 성모송에 들어와 있는 그 유명한 인사말로 맞이했습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천사가 전해준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덕분에 복되다고 인사를 들은 마리아는 그 유명한 성모 찬송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 성모찬송에는 자신에게 큰일을 해 주신 주님을 찬송하면서도, 부모를 거쳐 조상대대로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간직해온 신앙적 희망 즉 파스카 과업을 이룩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성모찬송은 파스카의 노래입니다. 


파스카 과업을 향한 방문 사건의 숨은 의미는 마리아나 엘리사벳이나 태중에 아기를, 그것도 주님의 도구로 쓰실 인물이 되실 아기를 모시고 있었다는 데에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 현존 안에 머물러 있었기로 그 같은 찬송과 과업 다짐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평생 이 방문의 신비를 묵상했었던 샤를르 드 푸꼬는 이슬람 신자들 투성이인 사하라 사막에서 마리아처럼 주님을 모시고 살기를 염원했습니다. 가난한 이들 속에서 더 가난하게 살면서 하느님은 알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못하는 그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이없게도 광신적 이슬람 과격분자의 총에 맞아 죽어간 그의 뜻이 싹트게 된 때는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난 후였고, 이 싹은 오늘날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작은 자매회의 수도자들을 통해서 온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샤를르 드 푸꼬의 삶에 뿌리를 둔 그들의 영성을 배우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꽃피우고 열매 맺기를 소망하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성모신심으로 가톨릭 신앙을 채우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갖추는 일은 절박한 과제입니다. 그렇게 연대해야 온갖 어려운 처지의 가난한 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장에 파견된 소수의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에게 성령의 온기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파견되어 투신의 삶을 살고 있는 활동가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처럼 자신들의 마음속 깊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모시고 사는 자세를 갖추는 일 역시 절박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야 청빈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들도 한국 사회의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천박함에 물들지 않고 마리아의 품위를 본받을 수 있게 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적이고자 하는 신자들이 현장성을 배우고, 현장에 투신한 활동가들이 영성에 귀의할 때, 성령의 기운이 물 흐르듯이 교회와 세상에 흘러나갈 수 있습니다. 방문의 신비에 담긴 의미가 이것입니다. 


샤를르 드 푸꼬는 그야말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사하라 사막에서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어울려 살면서도 외적으로 비천해 보이는 그 가난함만큼이나 풍요로운 복음적 품위와 향기를 품고 살았습니다. 이 같은 투신이 무신론적 혁명투사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에 살면서 더 보잘것없는 초라한 제대를 꾸며 놓고 홀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그가 꿈꾸었던 교회는 세상을 가슴에 품은 나자렛 예수님이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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