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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처음은 어둠의 마지막입니다”
  • 이기우
  • 등록 2019-12-31 1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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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팔일 축제 제7일 (2019.12.31) : 1요한 2,18-21; 요한 1,1-18


성탄 팔일 축제 제7일인 오늘은 2019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한처음에 계신 말씀을 선포하는가 하면 독서에서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시간관념은 양적으로 시간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한처음과 마지막 때라는 시간관념은 질적으로 시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양적인 시간을 크로노스(kronos)라 하고, 질적인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합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성사와 은총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은총이 성사를 통해서 드러나듯이, 카이로스가 크로노스 안에로 침투합니다. 카이로스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때를 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면 그 때는 비록 한 번 흘러가버리면 잊혀지고 없어지는 크로노스적 시간으로 표시가 되더라도 살아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생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크로노스적 시간관념으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약 33년간에 걸쳐 일어난 일이요 특히 마지막 3년간에 일어난 공생활에 우리는 주목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신 카이로스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크로노스적 시간 흐름에 상관없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그리고 매일 미사 때마다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이로스적 시간관념으로는 하느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때가 언제나 한처음이요 그 때문에 물러가야 하는 어둠의 편에서는 언제나 마지막 때입니다. 빛의 처음은 어둠의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이런 카이로스적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다가도 오늘처럼 크로노스적으로 마지막 날이 되면 그 의미가 특별히 살아있게 되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카이로스가 크로노스에 성공적으로 침투하려면 기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으로 기억이라는 의도적인 행위를 해야 카이로스가 크로노스 안에서 살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무릇 전례란 크로노스 안에서 카이로스를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편, 가정 성화 주간의 취지에 따라 묵상하자면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선포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따지고 보면 독신으로 살아가신 예수님께서 부부, 부모와 자녀 등 죄다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선포하신 기쁜 소식입니다. 이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가정에 초대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만 하면 누구나 형제요 자매가 될 수 있는 영적 인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나자렛 성가정 출신이신 분께서 사람 누구나의 목표인 천상 가정을 앞당겨 선포하시고 실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주는 혈연은 현세 안에서 시작되고 마치는 유한한 인연에 불과하지만 천상 가정 안에로 초대받으면 그 인연은 내세의 영원한 인연으로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 제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의 삶을 적극 권유하셨으며, 기왕에 가정을 이룬 이들에게도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고 공언하셨습니다. 히브리적 언어습관에서 ‘미워하다’는 말은 우리식 언어습관에서 말하는 ‘미워하다’와는 아주 다른 표현입니다. 실제로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에서 최우선순위가 아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자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루카 12,53)이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가정을 파괴시키거나 가족을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정을 존중하되 천상 가정을 지향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래야 가정과 가족도 본연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로 알아들으시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제와 정결의 덕행을 가르쳐 왔습니다. 천상 가정과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성의 자유를 남용하는 나머지 부부 간의 신의를 깨버리는가 하면 성의 축복은 물론 가정의 존엄성까지도 해치는 일을 너무나 자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붕괴된 가정이 많습니다. 겨우 가족의 해체를 면하고 일부일처제를 겨우 벗어나지 않는 경우에도 천상적이고 영적인 지향을 알지 못하면 현세에서 허락된 부부와 부모 자식 간의 인연도 그 빛이 바래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가족의 인연이나 가정은 창살 없는 감옥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가족은 천상 가정에로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입니다. 가족의 인연은 고달픈 인생길에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요 그래서 가족 간에 조건 없이 먼저 베푸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의 기적들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인 겁니다. 


이제는 혈연의 굴레에 매여 가족이기주의로 살아온 세월을 마감해야 할 마지막 때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가족의 인연을 성화시키는 길을 걸으면 이 때가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한처음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천상 가정에 편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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