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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야 들리고, 들어야 말 할 수 있습니다
  • 이기우
  • 등록 2020-01-02 15: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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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0.01.02) : 1요한 2,22-28; 요한 1,19-28




오늘은 가정 성화 주간의 넷째 날이면서 우리 교회 역사에서 수도생활의 선구자이신 두 성인을 기억합니다. 바실리오 성인과 그레고리오 성인이 그분들입니다. 


313년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 공인되어서 박해는 멈추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교회 안에 생겼습니다. 배교자, 밀고자는 물론 박해자까지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믿는 일이 죽을 일이었다면, 이제는 믿지 않는 일이 로마 시민으로서 불이익을 당할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물밀 듯이 들어오는 신자들 때문에 신자들의 수효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신앙을 검증하거나 미처 체험할 새도 없이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전반적인 신앙 열기가 식고 신앙 수준도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또 하나, 박해가 종식되어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에 나서야 했는데, 떨어진 신앙 수준으로는 선교는커녕 신앙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사막으로 나아갔습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최소한도로 음식을 먹고 거친 잠자리에서 은수생활로 목숨 걸고 기도생활에 정진했습니다. 수도규칙도 아직 없었고 가르침을 줄 스승도 없이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결과, 이 선각자들의 뜻에 동감한 동지들이 생겨났고 점차 늘어나서 수도회 운동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동방 교회 수도회들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택한 언어는 침묵이었습니다. 인간의 말을 멈추어야 하느님의 말씀이 들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하면서 동시에 들을 수는 없습니다. 또 들어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라고 우리 몸에 귀는 둘이나 되고 입은 하나만 있습니다. 


은수자들이 늘어나면서 흩어져서 가까이 지내되 홀로 살아가는 공주생활(共住生活) 형태가 생겨났는데 이는 아직 공동생활 형태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수도생활의 모태가 될 만큼 여러 수도규칙이 이 공주생활에서 유래했습니다. 공주생활에서도 은수생활의 본질인 침묵이 깨지지 않도록 대화는 최소한도로 줄이면서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수화나 눈빛으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오늘날 수도생활 규칙의 일부인 소침묵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소침묵의 대전제는 대침묵입니다.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는 최소한도로 줄이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굳이 미주알고주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웬만한 사정은 다 알고 있고 또 이해할만한 처지에서 살아갔기 때문에 은수자들의 공주생활에 편리했던 겁니다. 그래서 소침묵은 눈빛대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서로 통해야만 가능한 대화방식입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들끼리이거나 낯선 사람들과는 침묵 대신에 말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소통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뜻에 귀가 먼 사람들을 향해서는 대화 정도로는 안 되고 외쳐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택한 방식입니다. 이렇듯 침묵-눈빛 대화-정식 대화-외침의 네 가지 의사소통 방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느님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은 침묵이요, 이 침묵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친밀한 사이에서 의사소통하는 방식은 눈빛 대화이며, 낯설지만 서로 알아들을 귀가 있는 교양인들 사이에서는 합리적 대화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알아들을 귀조차 멀어버린 사람들에게는 큰 소리로 외치거나 팻말로 써서라도 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위 또는 흔히 ‘데모’라고 부르는 데몬스트레이션이지요. 


성화되기를 원하는 가정에 있어서도 하느님과의 대화인 침묵은 기본이자 필수입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제1덕목도 침묵이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귀와 마음이 있어야 그런 사람들 사이의 친교가 보장됩니다. 침묵의 언어는 하느님과의 대화만 가능하게 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친교를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웬만한 내용은 이 침묵의 언어로 대부분 전달되거나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꼭 필요한 의사소통도 눈빛 대화로 가능하게 됩니다. 눈으로 말하는 이 단계가 서로의 친밀함을 배가시킵니다. 아기 엄마가 갓난아이와 소통하는 방식도 이 눈빛 대화입니다. 연인이나 부부도 이 눈빛 대화가 가능합니다. 이것이 불가능해지거나 어색해질 무렵, 관계의 적신호가 켜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먼저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고 이해한 다음에 나도 할 말을 하는 대화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이해되기도 전에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쌍방간 독백이 되어서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잘 준비되고 순서를 지키는 대화는 서로간의 신뢰를 두텁게 해 줄 수 있고 서로가 간직하고 있는 세계관이 융합되어 훨씬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해 줍니다. 


침묵, 눈빛 대화, 대화 같은 의사소통 방식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듯이, 하느님께서도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이야말로 침묵이나 대화로 우리가 공유해야 할 사랑의 언어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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