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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의 끝까지 깨져 다다르게 된 체험이 ‘깨달음’이다
  • 이기상
  • 등록 2020-01-06 10:31:56
  • 수정 2020-01-06 10: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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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의 의미구조, 우리에겐 없음이 있음보다 더 근원적이다


서양의 문화와 역사에서는 존재, 즉 ‘있음’이 주도적인 근본 낱말이었다. 존재에 대한 이해가 일상생활을 각인했고, 학문세계를 이끌었고, 예술세계와 종교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관계맺음, 다시 말해 자신과의 관계맺음, 타인과의 관계맺음, 사물과 도구와의 관계맺음, 문화와 역사와의 관계맺음, 초월과의 관계맺음 등 모든 관계맺음이 존재이해의 지평 안에서 펼쳐졌다. 서양의 역사는 시간 속에 주어진 존재의 ‘자신을-보냄’에 인간이 응답해온 역사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 생각과 행위를 각인하고 이끌어온 근본 낱말은 ‘있음’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있음’은 ‘없음’을 배경으로 한 ‘있음’,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한다면, 없음의 지평 안에서 있음이다. 우리에게는 없음이 있음보다 더 근원적이다. 바로 이 점이 서양과 우리를 갈라놓는 가장 큰 구별점이다. 우리는 있음의 관점보다는 없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서양말의 ‘없음’은 거의 ‘있음’에 대한 부정으로 쓰여서 그 낱말형태도 부정의미의 전철이나 부정사를 사용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독립된 긍정적인 의미 차원을 갖는 것이 드물다. 그러나 우리말의 경우는 다르다. 다음에서 ‘없음’이 가리키는 의미구조를 찾아내어 그 구조계기들을 하나씩 밝혀보기로 한다.


1) 없앰 : 가이-없다, 그지-없다. 무한 부정 그 자체 [無, Lichten]


▲ (사진출처=NASA)


우선 ‘없앰’ 그 자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말로 ‘가이 없다’고 표현되는 사태에 주목해보자. 없앰은 ‘가’, 즉 끝, 테두리, 한계, 형상, 형태, 모습의 단순한 없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절대부정의 작용을 일컫는다. 모든 ‘것’을 없애는 부정 그 자체 말이다. 이것은 마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잡아먹어 무화시켜 버리는 ‘블랙홀(검은 구멍)’에 비유될 수 있다. 없앰은 모든 끝, 즉 모든 ‘가’를 갉아먹어 사라지게 만드는 저 텅빔에 다름 아니다. 어느 것도 이 텅빔의 흡인력 앞에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가이-없는 텅빔’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가이-없는 고요 속에 머문다. ‘가 없는 텅빔 그 자체’가 곧 늘 ‘없앰’인 것이다. 


없음은 근원적으로 보자면 ‘가이-없음’이다. 이 ‘가이-없이는’ ‘가를-없앰’에 터하고, 이 ‘가를-없앰’은 다시금 ‘없앰’ 그 자체에 바탕한다. 없앰은 자신마저도 없애 마침내 오직 텅빈 없음만이 ‘있을’ 뿐이다. 내용물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턱 트인 들녘만 있을 뿐이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이 있을 뿐이다. 얼개는 없고 바탕만이 있을 뿐이다.


없앰 그 자체는 공간 안에 등장하는 가 있는 모든 사물들의 ‘가’를 없앨 뿐 아니라, 이 공간의 ‘가’까지 없애 무한한 공간, 가이-없는 공간, 텅빔 그 자체, 빈탕한데, 끝이 없는 일자, 온통 하나(한, 한 나)를 이룬다. 그것은 또한 시간 안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시작과 끝을 없앨 뿐 아니라 시간 자체의 ‘가’까지도 없애 가이-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간, 끝없이 이어지는 ‘늘-그러함’을 만든다. 가이-없는 공간, 가이-없는 시간, 이 둘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그것을 하나이며 전체로 묶어서 이름한 것이 ‘한늘’, ‘하늘’, ‘한’, ‘하나’, ‘한 나(大我)’이다. ‘하늘’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일상적으로 일컫는 근본 낱말인 셈이다. 하늘은 하나이고 온통이다. 그 많은 별들이 생겨났다 사라지지만 하늘은 더 넓어지지도 않고 더 늙어지지도 않는다. 늘 그러한 텅빈 온통이다. 하늘이 그렇게 늘 그러한 텅빈 온통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없앰’의 힘 때문이다.


이 ‘가이-없는’ ‘가를-없앰’의 바탕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를 받아 주어진 ‘빔-사이’를 이으며(채우며) 주어진 ‘때-사이’를 잇다(살다, 사르다)가 다시 ‘가이-없어져’ ‘가이-없는’ 텅빈 온통 속으로 돌아가 다시 텅빔과 하나 된다.


가이-있는 모든 것은 오직 이 가이-없는 텅빈 온통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가’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텅빈 ‘빔-사이’가 아니라면 ‘가’는, 즉 형태, 모습, 형상은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텅빈 온통으로서의 ‘없음’, ‘무(無)’가 모든 유(有), 있음의 유래이며 가능조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무극과 태극의 관계, 공(空)과 색(色)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텅빈 온통으로서의 없음의 상태는 한마디로 ‘깨끗함’이다. 모든 끝이 완전히 다 깨뜨려진 가이-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끝을 다 깨어버리는 부정 그 자체의 체험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나 자신의 끝까지도 깨져 다다르게 된 체험이 곧 ‘깨달음’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깨지고 나 자신도 깨져 존재하는 것 속에 빠졌던 상태에서 깨어나 이제 비로소 나의 근원이고 바탕인 텅빈 온통 하나와 하나 되는 체험이 곧 ‘깨우침’이다. 독일어로는 Lichten, Freimachen, Vernichten, Nichts, absolutes Nichts 등의 낱말이 우리가 설명한 사태와 연관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2) 텅빔 : 텅빈 온통, 열려 있음 그 자체 [空, Offenheit]


앞에서 우리는 없음의 일차적 의미구조로 ‘가를-없앰’을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두 번째로 다루려고 하는 비움 또는 텅빔은 ‘없음’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앞의 것이 작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여기에서는 상태에 주목하고 있다. 앞에서 무한 부정이 강조되었다면 여기서는 가능조건이, 절대긍정이 부각된다.


텅빔은 가이-없는 텅빔과 가이-없는 ‘늘-그러함’을,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다 함께 고려에 넣은 온통 하나, 절대공 또는 단일허공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텅빈 온통’이 순전히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마당만은 아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서, 아니 ‘한늘’, ‘하늘’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모든 삼라만상과 사건들을, 나아가 앞으로 생겨났다 사라질 그 모든 만물들과 사태들까지도 포함한 무한한 ‘빔-사이’와 영원한 ‘때-사이’를 하나의 온통으로 생각한 것이 여기에서 말하려는 차원이다. 무극과 태극을 헤아린, 공(空)과 색(色)을 포괄한 하나이며 전체로서의 텅빔을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모든 세움을 쓰러뜨려 ‘빔’을 만들어내는 부정의 작용이 강조되었다면 여기에서는 생겨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끝이 없는 되풀이, 되삭임, 되먹임의 맴돌이 과정과, 그런 과정 속에서 온통 하나의 텅빔이 이르게 되는 됨됨이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끊임없이 되어감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발생의 사건이 벌어지는 텅빔의 마당을 이름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열린 마당, 열린 터 또는 열려 있음 그 자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구조계기에 대한 우리들의 체험은 각양각색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단순하고 장엄하고 원대하다. 끊임없이 터져 나와 끝없이 펼쳐져 나가는 생성 그 자체의 끝없이 되풀이되는 시원적인 비롯됨을 우리는 ‘한’, ‘하나’, ‘한 나(큰 나, 참 나)’라고 부른다. 이 하나의 텅빈 온통은 모든 펼쳐진 것을 자기 안에 포개어 간직한 단순한 것(das Einfache, Einfalt, 포갬 그 자체)이다. 이 단순함이 펼쳐 보이는 장대한 생성소멸의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해 한계를 벗어난 엄청난 것, 장엄한 것이다. 일어나고 있는 개개의 사물들과 사건들, 사태들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전체를 잃어버리고 만다. 절대를 놓치고 상대에 매달려 상대의 관점에서 유한한(가이-있는) ‘있음’만을 보게 된다. 


온통 하나인 텅빔에 알맞은 우리의 태도는 침묵이다. 장대한 생성소멸의 사건들이 펼쳐지는 저 가이-없는 빔-사이와 때-사이의 고요와 적막을 느낄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 이 구조에 해당되는 독일어는 ins Freie, ins Offene, die Offenheit 등이라 할 수 있다.


3) 아님 : 앗아감(빼앗음), 사라짐, 달라짐, 변화 [不, 非, 無化, Nichten]


지금까지 하나이며 전체인 텅빈 온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가이-없는 ‘빔-사이’와 가이-없는 ‘때-사이’ 안에서 일어난, 앞으로 일어날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며 또한 바로 이러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무한 마당으로서의 절대공(絶大空)까지도 헤아리는 차원이었다. 이제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구체적인 사물들의 없음 또는 없앰이 고려의 대상이 된다. 


있음에 대한 시각이 지속적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면 없음에 대한 시야는 끊임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 다르게 되는 것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동일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차이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있음’은 정체성, 실체성, 기체성과 같이 변화의 와중에 있으면서도 그 변화를 두루 꿰뚫으며 어떤 것을 계속 그것으로 만들고 있는바 그것에 관심을 갖게 한다. 반면 ‘없음’은, 그러한 동일한 있음이 끊임없이 부정될 수 있는 ‘아님’의 바탕이다. 시간의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없음, 아님에 의해 존재의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있음의 변화를 존재 또는 있음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없음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구체적으로 변화하는 사물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뿐 아니라 이해의 지평 자체가 달라진다. 


동일한 있음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관심도 따지고 보면 있음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서 동일한 것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도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변화의 한가운데 있다. 변하지 않는 진리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그 사실뿐이다. 있음을 고집할 경우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는 그 본을 찾을 수가 없기에 그러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 본은 모든 구체성, 개체성을 추상한 이데아, 이념이며 관념인 것이다. 있음을 위한 표본은 이념이다. 이념은 모든 없음, 아님, 앗아감의 저편 안전지대에 놓여 있는 박제된 실체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변화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다. 


‘빔-사이’와 ‘때-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은 앞에서 얘기한 절대부정의 없앰의 작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의 있음은 텅빔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사이를 차지하며 일순간의 때를 잇다가 없음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철두철미 없음에 의해 둘러싸인 있음이다. 차라리 없음과 없음, 빔과 빔을 잠시 이으며 있다가 없음과 빔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러한 잇음으로서의 있음이다. 이러한 찰나적인 있음을 우리는 ‘사름’, ‘불태움’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사물들은 모두 저마다에게 주어진 때를 주어진 빔 속에서 잠시 사르다가 텅빔 속으로 되돌아가는 그런 사름들이다.


이렇게 우리는 사물들의 ‘있음’을 있는 그대로 ‘끊임없는 되어감’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사물들의 근본구조를 ‘됨됨이’로 파악했다. 사물들의 됨됨이는 사라(살아)가며 그렇게 사라가는 동안에는 지속적으로 되어가는 ‘됨’을 되풀이해야 하기에 그런 되풀이 속에 만들어진 바탕과 얼개라는 의미에서 ‘됨됨이’라고 지칭되었다. 됨됨이는 어느 정도 확정된 바탕과 얼개이긴 하지만 어려움에 부대끼며 특정한 사름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그 어려움에 익숙해지고 그 어려움의 뜻을 알게 되어 그것을 되삭임해서 더 나은 ‘되풀이거지’(패턴)를 배우게 된다. 되삭임하면서 배워 익힌 되풀이거지는 되먹임되어 바탕과 얼개로서의 됨됨이에 각인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반응이 효율적임을 깨닫게 되어 반응의 규칙을 만들게 된다. 그러한 특정한 행동양상이 관습이 되고 도덕이 되고 윤리가 된다. 그러한 삶의 규율과 문법에 따라 좋고 나쁨이 구별되고 옳고 그름이 가려지고 참과 거짓이 분별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님’의 작용이다. 


이러한 ‘아님’의 현상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낀다. ‘아님’은 부정뿐만 아니라 새로움도 가져오기에 물론 흥분과 기대감, 호기심도 갖게 한다. 그러나 ‘아님’의 사건이 폭넓고 깊이 있게 일어나면 날수록 두려움과 무서움은 커져 놀람과 경악이 된다. 이에 해당되는 독일어는 Nicht, Nichten, Verneinen 이다.


4) 없음 : 거기-없음, 부재. [虛, Abwesen]


이것이 보통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뜻이다. 있음에 대비해서 개체 부정의 상태를 지칭한다. 구체적인 특정한 ‘때-사이’와 ‘빔-사이’에 특정한 어떤 것이 없는 상태를 확인하여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있음’의 관점에서 없음으로 확인하고 있는가이다. 여기에서는 절대적인 없음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없음이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지어 제기된다. 구체적인 상황 아래에서 특정한 관점 아래 비어 있는 상태가 발견된 것이다.


“돈이 없다.” 돈 그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어느 누가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노력이 없다.”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들여야 하는 최소한의 행위가 필요한데, 이 요구되는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한다. “재질이 없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과 관련지어 그에 합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아니함을 뜻한다. 위의 경우가 하지 않아서 없는 상태라면, 이 경우는 그 사람에게 어떤 것이 자체적으로 없음을 가리킨다. “반찬이 없다.” 반찬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있지 않거나 많지 않음을 나타낸다. “부모가 없다.” 부모가 지금 살아 있지 아니함을 뜻한다. 낳은 부모를 모르는 고아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농사지을 땅이 없다.” 물건이나 수단 등을 갖고 있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그럴 수는 없다.” 어떤 것이 가능하지 않거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어떤 것이 사실적으로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로 있어야 할 것으로 기대되고 요구되는 것이 아쉽게도 없음을 뜻한다. 이러한 없음은 철두철미 있음의 관점에 비친 순전한 상대적 없음이다. 서양말에서는 이러한 없음이 주도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우리말에게는 갈래 의미의 하나로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서양말에서는 이러한 없음마저도 독자적인 형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 대한 부정의 형태로서 사용될 뿐이다. 즉 ist nicht (Nicht-sein), Ab-wesen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있지 아니함’ 외에 독자적인 언어형태인 ‘없음’이 있고 바로 이 ‘없음’이 더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형태이다. 이렇듯 서양은 언제나 있음의 관점 아래에서 없음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다.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특정의 사물과 관련지어 사용되는 존재의 부정, 있음의 부재 또는 있음의 탈락 등을 뜻하는 ‘없음’은 ‘무(無)’의 나타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없음은 없는 것이기에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데에 부각되어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정한 무의 나타남에 대해 인간은 아쉬움, 결핍감, 결여를 느낀다. 그런데 특정한 어떤 것의 없음이 아닌 나 자신의 없음과 연관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의 없음, 일체의 존재하는 것과 연관된 ‘아무것도 없음’으로 확산되면 그때의 느낌은 ‘불안’이다. 없음이 모든 있음 위에 드리워져 무(無)의 어둠이 모든 것을 휘덮게 되면 인간은 ‘절망’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의 독일어 표현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Nicht-sein, Ab-wesen, Ausfall 등이다.


5) 빠짐: 빔, 없이-있음, 빠져나감. [缺, Ohne, Entbehren, Mangel]


지금까지 이야기한 없앰, 텅빔, 아님, 없음 등을 그러한 현상에 대한 접근방식과 관련지어 고찰할 수 있다. 앞에서 나름대로 해당의 현상에 대한 인간 쪽의 느낌을 언급하기는 했다. 여기서는 그런 느낌과 연관 지어 공통적인 계기를 찾아보기로 한다.


없음에 대한 느낌은 있음에 대한 그것과 같을 수가 없다. 있음은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야기하는 작용에 의해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있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준도 정하고 법칙도 정해 합의된 논의를 펴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없음에 대한 접근이 있음의 경우와 같을 수는 없다. 


인간의 오감 또는 지성, 이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없다. 없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고감도의 ‘감성’이 필요하다. 그것을 종교적인 용어로는 ‘영성’이라고 한다. 영성의 차원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감성의 차원에서 우리는 ‘없음’을 지각하기도 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돈이 없다”, “노력이 없다”, “재질이 없다”, “부모가 없다” 등처럼 영성적인 능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라도 확인할 수 있는 없음에 대한 경험을 언급하였다. 이 경우 우리는 무언가 빠져 있음을, 무언가 빠져나감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빠져나감이 일으키는 바람을 느끼는 셈이다. 그것은 없음의 흔적, 없음이 만들어 놓은 빈자리를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나름대로 전체에 대한 안목을 전제로 한다. 


없음의 빈자리를 알아볼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에서 개개의 자리와 그것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전체가 갖고 있는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전체의 크기와 너비는 각기 다르다. 그것은 작게는 세포나 원자 단위와 같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나 개체, 가정, 사회, 국가, 지구, 행성, 태양계, 은하계, 우주 전체, 태극(있음), 무극(없음), 텅빔(있음+없음)에까지 넓혀질 수 있다. 이러한 전체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사물들이 있듯이 그렇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흡사 ‘없이-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전체에 대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없음의 흔적도 각양각색이다. 


빈자리, 빠져나간 흔적을 알 수 있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없음을 없음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하나이며 전체인 온전함(온통)에 대한 시야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온전함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룩함, 성스러움,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현대와 같이 모든 것을 끝없이 쪼개고, 쪼갤 수 있는 최소단위를 찾아 그것으로 전체를 설명하려는 환원적 설명법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온전함은 찾을 수 없으며 당연히 없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는 빈자리가, 없음이 보일 리 없다. 


‘빔’에 대한 이러한 느낌은, 온전함에 대한 어떤 관점에서 ‘빈’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진 빈털털이에게 돈이 없음은 궁함일 것이다. 비오는 날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샐러리맨에게 자동차가 없음은 아쉬움일 것이다. 사업이 망해 길거리에 나앉게 된 가족들에게 돈 또는 집이 없음은 비참함일 것이다. 사업으로 남편을 이국땅으로 떠나보낸 아내에게 남편의 부재는 허전함일 것이다. 각고의 노력과 인내로 추진해온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성과의 부재는 허탈감을 안겨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애인이 이 세상에 없음은 허무감을 안겨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은 소녀 가장에게 부모가 없음은 절망감일 것이다. 


나라를 잃은 애국지사에게 나라가 없음은 극도의 허무감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한다. 하느님이 없다는 주장은, 하느님을 믿는 독실한 신자에게 하느님을 부인하게 함은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 하느님이 없음은 삶이 의미 없음을 뜻하며 절망과 허무만이 남을 뿐이다.


태극, 즉 있음만이 아니라 없음 자체, 텅빔 자체, 무극까지도 온전함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그 텅빔의 빔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온전함의 정도에 따라 거룩함의 정도가 결정된다면,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있음만을 고려에 넣은 존재 중심의 온전함보다는 그 모든 있음을 담고 있는 텅빔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없음 중심의 온전함이 ‘더 거룩’하고 ‘더 성스럽다’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위대한 영성가들이 한결같이 신비가들로서 이 없음을 없음으로 깨닫고 없음과 교통한 사람들임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영성가들은 이성이 아닌 얼로써 텅빔과 교감하였다. 그들은 단순히 몸나와 맘나의 차원에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얼나로서 한 나(큰 나, 大我)인 우주의 한얼과 일치를 꾀하였다. 한얼과 일치한 삶은 우주의 텅빔 속에 자신을 비워 얼로서 하나가 되는 그러한 영성적인 삶이며 거룩한 삶이다. 다석 류영모가 살았던 바로 그러한 거룩한 삶이다.


▶ 다음 편에서는 ‘성스러움에 대한 관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존재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가’를 받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 일자에서부터의 유출, 무극에서 태극, 태극에서 음양의 생성 등과 같이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다. 여기 우리의 논의에서는 우주의 살림살이의 대원칙이 ‘나눔’과 ‘비움’이라는 것만을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빔-사이’와 ‘때-사이’를 잇는 찰나적인 있음으로서 잠시 ‘없음’과 ‘없음’ 사이를 잇다가 ‘없음’ 속으로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때의 사라짐이 ‘절대무’로의 사라짐인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의 바뀜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한번 존재하게 된 것은 절대무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힘을 사르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나누면서 우주의 생명운동에 동참하다가 결국 자신을 비워 우주의 생명력 안으로 흡입되어 버린다. 개체의 존재자들을 흡입한 우주의 생명력은 끊임없이 다른 것을 생성해낸다. 여기에서 우리의 논의는 ‘없음’의 관점에 한정되기에 이러한 존재생성의 사건들은 다루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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