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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지면 이승의 짐승이다
  • 이기상
  • 등록 2019-12-30 11:5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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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편에서 이어집니다


3) 한얼님


한얼님은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을 채우고 있는 신령한 힘을 말한다. 우리는 이를 절대생명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사람이 얼나이기 때문에 절대생명인 한얼과 소통할 수 있다. 다석에 따르면 ‘성스러움’, 즉 ‘거룩함’은 한마디로 ‘없이 계심’이다. 인간이 이 ‘없이 계심’에 가까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 이상 ‘성스러움’도, ‘신적인 것’도, ‘신성’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 ‘없이 계심’에 대한 시야를 되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떠나버린 신의 도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이 거룩함은 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도 볼 수 없다. 오직 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인간이 얼나로 솟나야만 그 성스러움을 맞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성스러움과 하나가 될 수 있다. 


▲ Salvador Dali < 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


다석에 따르면 사람이 거룩한 하느님,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다. 첫째는 무한한 우주의 허공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우주에 깔려 있는 무수한 별무리를 보는 것이고, 셋째는 내 마음 속으로 오는 성령을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이르는 길 가운데 여태껏 간과해온 ‘무(無)’가 핵심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대의 하나로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아’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그렇게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탱시켜 주는 거룩한 힘인 성령, 또는 다른 말로 ‘한얼’을 만나게 된다. ‘허공’, ‘한아’, ‘한얼’을 ‘한울님’, ‘하느님’, ‘한아님’, ‘하나님’, ‘한얼님’으로 부르든 이름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어차피 이름 속에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잡아넣을 수는 없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있는 모든 것, 전체가 하느님이다. 무한 허공에 많은 별들이 고기떼처럼 유영하는 것이 하느님이다. 거기에 하느님의 얼은 없는 곳이 없다. 이 전체 존재, 절대 존재가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은 얼과 빔의 하느님이 변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의 근본은 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는 물심(物心)의 경계가 있을 리 없다. 무가 실체요, 유는 무의 변태이다. 그러므로 다시 무로 돌아가야 한다. 무는 살아 있는 무이기에 얼의 무요, 얼의 공이다. 그 얼이 내 맘속에 솟아오른다. 그래서 전체인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얼을 보내주지 않았으면 알지 못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참이신 하느님은 없는 것 같다. 없는 것 같은 것이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얼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가득하다.” 


“시작했다 끝이 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끝을 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낳아서 죽는 것이 몸이요, 죽어서 사는 것이 얼이다. 얼은 제나가 죽어서 하는 생명이다. 형이하(形而下)에 죽고 형이상(形而上)에 사는 것이다. 단단히 인생의 결산을 하고 다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요 회심이다. 얼에는 끝이 없고 시작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나는 소용이 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이 얼나인 참나다. 석가의 법심,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사람은 남녀의 피부접촉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하느님의 몸이라 할 수 있는 허공을 깊이 느낄 때 하느님의 거룩하고 부드러운 살에 닿는 맛에는 비길 수 없다. 하느님을 사랑함은 거룩함을 입음이다. 다석은 빔(허공)을 깊이 느껴서 말하기를,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허공밖에 없는 이 세계에 얼나는 허공의 아들이다. 절대의 아들이다. 절대의 아들인 얼나가 참나인 것을 깨닫고 요망한 몸나에 대한 애착이 가셔지는가가 문제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올라간다. 그때가 되면 하나인 허공이 얼나를 차지할 것이고, 허공을 차지한 얼나가 될 것이다. 이러면 얼나의 아침은 분명히 밝아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얼이 지구의 지각 밑에 들어 있는 암장이라면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암장이 아니라 용암(magma)이다. 암장에는 용암과 함께 가스가 있다. 땅위로 분출되면서 가스는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용암만 보지 암장은 못 본다. 사람의 입으로 나온 말씀에는 이치만 있지 거룩은 볼 수 없다. 그것이 천음(天音)과 인언(人言)의 차이다. 음(音)과 언(言) 글자의 형성은 비슷하다. 둘 다 창으로 찌르는 것을 형상화한 신(辛)과 입의 모양을 형상화한 구(口)를 합친 회의문자다. 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암장처럼 마음을 뚫고 나오는 말씀이다. 지각을 뚫고 나오는 용암을 막을 수 없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막을 길이 없다. 다석은 말한다. “생각을 자꾸 하는 사람은 말을 하고 싶다. 참 말씀을 알고 참 말씀을 하려는 사람은 그 가슴 속에서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이다.” 

 

4) 하느님


▲ Eugène Delacroix < La Mer vue des hauteurs de Dieppe >


인간이 구체적으로 소통하면서 나타나는 절대존재는 하느님이다. 역사 안에 말씀의 형태로 자신을 내보이시는 하느님이다. 절대생명으로서의 한얼의 부름에 사람이 응답하였고 이 응답으로 이름을 받은 신이 하느님이다. 생각으로, 사람의 말로, 말씀으로 파악되어 어느 정도는 이성의 대상이 된 신이 ‘하느님’이다. 다석은 말한다. 


“하느님이 그리워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줄여져 글이 되었다.” 


“이 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실을 뽑아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하느님을 생각하러 왔으므로 말씀의 집(思想)을 지어야 한다.” 

 

“생각이 문제요 말씀이 문제다. 생(生)도 사(死)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생각이다. 사람은 진리의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이다. 나를 통한 성령의 운동이 말씀이다. 성령은 내 마음 속에서 바람처럼 불어온다. 내 생각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은 것이 말씀이다.”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어도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큰 성령이신 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을 내 마음속에 들게 하여 주신다. 말은 사람에게 한다. 사람과 상관하지 않으면 말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사는 까닭에 말이 나오게 된다. 생각이 말씀으로 나온다. 참으로 믿으면 말씀이 나온다. 말은 하늘 마루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을 받아서 씀으로 하느님을 안다. 그렇게 말을 받아서 쓴다고 말씀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딴나서 그릇된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지면 이승의 짐승이다.” 



“사람은 몸을 쓰고 있다가 맘으로 바뀌고, 맘을 쓰고 있다가 뜻으로 바뀌고, 뜻을 쓰고 있다가 얼로 바뀌어야 한다. 봄이 여름으로 바뀌고, 여름이 가을로 바뀌고,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것이 자연이다. 하늘, 땅을 펼친 우주적 자리에서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이 자연이요 인생이다.” 


5) 하느님과 있음


다석의 하느님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크게 네 가지를 구별하여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 온통 하나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무극과 태극 그리고 영극(靈極)까지도 포함하기에 텅빈 온통 속에, 가이-없는 ‘빔-사이’와 끝없는 ‘때-사이’ 안에서 생성, 소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다 품고 계시며 주관하는 하나님, 그리고 변화의 한가운데에서도 온통 전체를 유지  보존하고 끝없는 힘돌이, 열돌이, 숨돌이, 피돌이로써 되어감의 맴돌이와 되삭임, 되먹임하고 이루어나가는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즉 텅빈 온통,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텅빔 속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생성 소멸 변화의 사건 전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절대적 하나인 온 전체 속에서 운행하시는 신비스러운 힘 그 자체 이러한 세 가지 국면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둘째는 이중 무극만을 떼어내 고찰한 절대공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모든 있음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텅빔 그 자체를 의미한다. 셋째는 태극, 즉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되어감의 전개과정, 생성, 소멸, 변화를 주관하는 하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넷째는 흔히 하느님의 마음이라 표현되는 우주의 얼로서의 한얼님이다. 텅빔 속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얼에 따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서로 교통할 수 있다.


다석에 따르면 무(無)는 단일허공(單一虛空)인 전체다. 그런데 단일허공 안에서 천체를 비롯해 우주의 먼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체가 생겼다. 이것은 허공이 변해서 생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공밖에 없는 허공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개체는 허공에서 잠깐 동안 있다가 없어진다. 단일허공은 영원 무한한 데 비해 개체들은 공간적으로도 작고 시간적으로도 짧다. 그러나 하늘의 별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개체들은 반드시 원래 모습인 무(無)로 돌아간다. 사람도 그러한 하나의 개체다. 이 개체는 한번 왔다가 가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석은 말한다. 


“우리는 지나가는 한 순간밖에 안 되는 이 세상을 버리고 간다면 섭섭하다고 한다.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 일왕불복(一往不復)이다.” 


상대적 존재란, 있어도 없는 것이지만 하느님에게 받은 사명이 있어 존재의 값어치를 얻는다. 우리는 스스로가 상대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적 존재는 낱 수가 많은 작은 것들로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 존재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로서, 유일 절대의 존재로서 없이 있기에 비롯도 마침도 없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인 개체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고 절대적 존재인 전체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그런데 다석에 따르면 개체인 인간이 전체인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개체가 할 일은 전체로 돌아가 전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체의 참 생명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회복하고 전체로 복귀하는 것이 영원한 삶에 드는 것이요, 참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 


무극인 무(無)에서 유(有)가 나와 태극이 되었다. 유(有)가 나오지 않았으면 무극일 뿐이다. 그러나 유(有)만이 태극은 아니다. 유(有)를 내포한 무극이 태극이다. 무극은 무(無)라 불변의 절대이다. 그러나 태극의 유는 바뀌는 역(易)이다. 시시각각으로 계속 바뀐다. 바뀜을 멈추는 일은 없다. 바뀌는 유(有)도 줄곧 바뀐다는 것만은 불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상대세계에 와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여기에서 할 일은 우리가 변화를 잘 이룸으로써 불변의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16) 


하나는 전체라는 뜻과 절대라는 뜻이다. 전체와 절대는 유일존재로 하느님밖에 없다. 이 존재는 없이 있는 허공이다. 절대 허공이 전체이고 절대 허공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멸의 물체를 개체라 한다.(17)


▶ 다음 편에서는 ‘없음의 의미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문화일보, 1996, 321.


⑵ 참조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박영호 풀이, 335 이하.


⑶ 같은 책, 71.


⑷ 같은 책, 91/2.


⑸ 같은 책, 93.


⑹ 같은 책, 129.


⑺ 같은 책, 122.


⑻ 같은 책, 117.


⑼ 같은 책, 110.


⑽ 같은 곳.


⑾ 같은 책, 122.


⑿ 같은 책, 130/1.


⒀ 같은 책, 329.


⒁ 같은 책, 273.


⒂ 참조 같은 책, 308.


(16) 참조 같은 책, 329.


(17) 참조 같은 책, 334 이하.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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