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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긴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 이기우
  • 등록 2020-01-09 14:57:43
  • 수정 2020-01-09 16: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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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2020.01.09) : 1요한 4,19-5,4; 루카 4,14-22ㄱ


오늘의 복음과 독서는 공현의 역사적인 목표와 실제적인 영성을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메시아가 오시면 이룩될 일을 일찍이 이사야가 내다본 아주 유명한 대목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골라 봉독하시며 당신 사명을 천명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리셨고 그 영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나자렛 선언은 파스카 과업의 역사적 목표이자 공현의 역사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하는 소아시아의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그들이 지닌 합리적 가치관에 기대어서라도 이 역사적 목표와 과업을 솔직 단백하게 토로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선이해(先理解)가 없는 그들도 선과 악을 판별하는 양심은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요한은 계명이라는 명제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익숙한 승리와 패배의 도식을 활용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파스카 과업이 이제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계승되어야 함을 그들의 사고방식과 언어로 설득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젊은 신학자로 회의장의 말석에 참석하여 교회 쇄신의 열기를 함께 호흡했던 카롤 보이티야가 공의회 후에 주교품을 받고 자기 교구에서 공의회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모범은 매우 좋은 인상을 바오로 6세와 추기경단에게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유럽 출신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직에 선출되었습니다. 직전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 1세가 겨우 37일 만에 급서했기 때문에라도 카롤 보이티야 추기경은 공의회의 뜻을 이어 받아 교회를 쇄신하려던 전임자의 뜻을 살리기 위해서 요한 바오로 2세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5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선출되어 28년 동안 공의회 정신을 온 교회 구석구석에 심기 위해 요한 바오로 2세는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를 방문했고 가장 많은 회칙을 반포하였습니다. 특히 조국 폴란드는 열 차례 이상 방문하여 그 당시 공산 정권과 맞서고 있던 자유 노조를 공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미국과의 핵군비 경쟁에 시달려 경제가 어려워지고 민심을 잃어가던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인 동유럽 공산권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결국 그의 치세에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이 공산권 블록에서 해방되었으며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은 통일을 이루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20세기 초에 무신론 사조를 바탕으로 하고 폭력을 무기로 일어난 공산 혁명을 같은 세기 안에서 패배시킨 승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무신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나자렛 선언의 명령을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회칙 모두에 담았습니다. 그 자신도 젊은 시절 노동자였던 체험을 바탕으로 첫 회칙은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반포했습니다. 이 문서에서 노동의 관점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바라본 그는 창조의 노동을 하신 하느님을 따라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체제 모두 노동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본 위주로 운영되는 무신론적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신랄하게 고발했고 노동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동기로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 노동이 한 차원 높여서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이어야 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가는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면서 노동의 영성을 가르쳤습니다. 한 마디로 노동의 복음을 선포한 겁니다. 


그리고 교회라는 조직의 내부적 관심에 매몰되어 가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회칙도 반포했습니다. 이 ‘사회적 관심’ 회칙에는 ‘인간의 구원자’, ‘평신도 그리스도인’, ‘여성의 존엄’ 같은 문서들도 다 한 묶음으로 엮일 수 있는 포괄적인 내용이 매우 진취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톨릭역사상 첫 사회회칙인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지 백주년을 기념하는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문서를 반포했으니, 그것이 사회교리 백년을 집대성한 ‘백주년’ 회칙입니다. 



그의 교황직 치세 동안에 나자렛 선언에 담긴 파스카적 과업이 상당히 진척되었습니다. 우선 가난한 노동자들의 인권이 지닌 존엄성을 일깨워 노동의 영성에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함으로써, 두 번째로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톨릭 독재자들에 의해 억눌리던 민중의 해방을 지지함으로써, 세 번째로 공산 정권 치하에서 무신론 체제로 잡혀있던 인류의 반쪽 진영을 해방시킴으로써 그는 공의회가 의도했던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현대세계 안에서의 공현을 성취한 나자렛 선언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일도 있습니다. 니카라구아 민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아 원치 않게도 혁명 내각에 참여했던 에르네스토 까르데날 신부를 단죄했던 일이 그것입니다. 사회변혁과 영성쇄신을 아울러 추구하던 그는 그 나라 민중이 기억하는 현대의 성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행착오는 영성과 노선에 있어서 에르네스토 까르데날을 빼닮은 아르헨티나의 베르고글리오 신부를 주교로 임명한 데 이어 추기경으로까지 서임함으로써 현재 공현의 파스카 과업이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밑거름을 준 공적으로 가름해도 될 듯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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