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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은 ‘없는 것’이다
  • 이기상
  • 등록 2020-01-13 10: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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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에서의 존재와 성스러움 >이라는 논문에서는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통해 제시해 보인 성스러움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즉 온전함(전체성), 열려 있음(개방성), 자신을-숨김(은닉성) 그리고 신비스러운 힘(작용성) 등이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밝혀 보인 성스러움의 차원과 다석이 생각한 성스러움의 계기들이 근본에서는 합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성스러움’, 가이-없는 공간과 끝이 없는 시간 전체를 통틀은 것


▲ ⓒ 가톨릭프레스 자료사진


존재자에 방향이 붙잡힌 시각으로는 이러한 성스러움을 예감할 수조차 없다. 온통 전체로서, 전체성 그 자체로서 경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고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열려 있음 그 자체로서 경험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을 숨기고 있는 비밀스런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성스러움은 도대체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없는 것(무)이다.


존재 중심의 시각으로도 그 성스러움을 사람들은 예감할 수 없다. 열린 장의 열려 있음과 시공간을 모두 포괄하는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존재의 지평 속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의 지평을 가능케 하는 끝이 없는 열려 있음이고 바닥없는 심연, 가이 없는 텅 비어 있음이다. ‘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공간 안에서 머무르고 시간 안에서 흘러감을 전제한 것임을 고려할 때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가이-없는 공간과 끝이 없는 시간 전체를 통틀은 것이다. 그것은 그렇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한 없음을 우리는 앞에서 ‘없이-있음’이라고 이름하기로 했다. 존재자에 눈이 멀고 현전 중심의 존재이해에 얽매여 존재를 현전하는 것의 현전함 속에서만 볼 경우 성스러움의 영역은 없다. 존재망각의 역사와 더불어 성스러움의 영역이 사라지고 그래서 신들이 떠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술과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성스러움이 외면되고 있는 불행한(heil-los, 온전치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불행은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도 전혀 그런 온전치 못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세계 속에서 오히려 포근함과 안온함을 느끼고 있다는 데에 있다. 가장 큰 위기는 위기 속에 던져져 있으면서도 그 위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거기에 있다. 


그런 위기가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 곧 서양철학, 형이상학 곧 서양 형이상학이 하던 서양 중심의 형이상학적 이해의 틀을 탈피해야 한다는 서양철학자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탈레스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자체의 시원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건은 단지 그리스적인 존재자 전체로의 침입사건일 뿐임을 우리는 하이데거와 더불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형이상학의 유일한 근원이나 유래일 수는 없으며 형이상적인 것에 대한 탐구의 전형이 될 수도 없고 더구나 존재사건 그 자체일 수는 결코 없다. 나아가 하이데거는 존재사건에 대한 유럽적인 대응투사가 너무나 로고스적이고 학문적이어서 존재와 차이, 무(無)와 은닉을 애초부터 제대로 숙고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던가 제거해 버린 원천적인 무(無) 제거의 역사였음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사유태도의 근원적인 한계를 밝혀내고 있다.


우리시대 새로운 존재 이해의 틀을 만들어 보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자 중심, 현전 중심, 탈은폐 중심, 인간주체 중심의 존재역사가 몰고 온 위험을 우리가 처해 있는 기술과 과학의 시대의 가장 큰 위험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표상하는 사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전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숙고와 논의를 원천적으로 막아 버린 귀결이 오늘날 지구 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파괴와 환경파손이며, 이것은 그동안 봉쇄당했던 무(無)가 벌이는 ‘무(無)의 반란’ 현상임을 하이데거는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존재와 무, 차이와 은닉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을 새롭게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 중심의 사유태도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사유태도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구적 시대를 맞이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서로 협심해서 현대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적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당위성을 깨닫고 있다. 여기에 유럽과는 다른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한국의 철학자들이 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것은 곧 동양 문화권에서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 주목하여 그에 대한 여기 이 땅에서 현존재의 대응방식을 연구하여 그 독특함을 천착해내는 일이다. 서양이 자기중심적인 우월감으로 자신만의 전통을 고집하며 자기 시각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존재자 중심, 로고스 중심으로 고찰해 왔다면, 일찍부터 서양문화가 침투함으로써 자유롭지 못하게 존재자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 했던 동양인들의 열린 시야가 이제는 문제를 새롭게 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동양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세계문화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행위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적 숙고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전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달라진 해석학적 상황과 이해의 지평에 대해 성찰하여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존재이해의 틀을 만들도록 힘써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무(無), 공(空), 허(虛) 등의 비존재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쏟아 왔던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태도가 유럽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에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 ‘비논리적’이며 ‘신화적’이고 너무나 ‘애매모호하다’고 학문적 논의의 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주제들이 실은 존재사건에 대한 참다운 대응방식에 관심을 두었던 선조들의 조심스러운 사유태도에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 존재발생사건에 대한 시원적이고 대안적인 다른 대응투사방식을 찾고 있는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다석 류영모의 영성적 사유는 충분히 활짝 열린 길로 안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다음 편에서는 ‘우리시대 하느님과의 소통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이기상,  < 하이데거에서의 존재와 성스러움 >, 『철학』 제65집(2000년 겨울호) 209~239.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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