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대한민국 사회는 격변의 시기였다. 봄에는 북미 관계의 파도가 우리 일상을 출렁이게 했고, 여름의 끝자락에서는 정경심 교수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로 촉발된 대국민 항쟁이 가을, 겨울로 이어지며 서초동 검찰청과 여의도 국회 앞 도로를 점거한 범민주 진영의 촛불항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광훈 목사를 주축으로 시작된 한기총의 광화문 집회는 우리사회의 종교적폐 문제를 세상에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다. 2016년 대한민국 광화문에서는 ‘이게 나라냐!’ 라는 구호를 외치다가는 2019년 서초동과 여의도에서는 ‘이게 종교냐!’, ‘이게 교회냐’라는 푸념과 조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한국갤럽 >이 지난 2019년 5월 9일부터 25일까지 전국(제주 제외) 만 13세 이상 1,700명을 상대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종교’를 조사했다. 그 결과 26%가 ‘불교’에 호감을 표시했으며 그 다음은 ‘개신교’(20%), ‘천주교’(11%) 순이었다. 43%는 ‘호감 가는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으며, 이 응답은 2014년 10월 조사에 비해 5% 증가한 수치다. 비종교인들 중에서는 74%가 ‘호감 가는 종교가 없다’고 답했다.⑴
이 시대의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탈종교화’ 현상이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사회로 접어든 세계시민사회에서 종교인구의 급감과 종교시설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3월 캐나다 공영방송 < CBC > 에서는 캐나다 교회 27,000개 중에서 9,000개가 10년 안에 문을 닫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은 한 해 4,500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유럽은 ‘신 없는 사회’, ‘종교 없는 삶’이 ‘잘 사는 사회’가 되었다. 북유럽국가들, 특히 스칸디나비아 3국은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다. 아이슬란드 국회에서는 ‘모든 종교는 대량살상무기’라고 했다는 말의 진위를 놓고 공방이 이어진다.⑵ 문장의 진위를 떠나 잘못된 종교의 영향이 민중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의 갤럽조사에서 확인된바 무종교인이 전체인구의 56.1%를 차지한다. 이미 국민의 반이 넘는 사람들이 종교를 떠났고, 무관심해졌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신부가 되겠다는 학생들이나 수도자 지원자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성직이나 수도자 지원자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것은 그 종교의 분위기에 대한 구체적인 가늠자다. 이미 종교는 현대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을 잃어버렸으며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그 안에 있는, 그것을 떠받치는 이들만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믿음의 종교’에서 ‘이해와 깨달음의 영성’으로
종교의 시대가 지나고 있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던 종교가 이제는 ‘이해와 깨달음’의 영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족과 나의 안녕과 축복을 바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 종교의 시대가 지나고 나의 집착과 욕심을 줄이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보다 나은 ‘나’의 모습으로 변화해 가기 위한 자기수련과 성찰의 연습이나 수련, 피정이나 출가체험 등에 사람들은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찰에서는 ‘템플스테이’ 열풍이 불었고, 성당에서는 여러 가지 ‘피정’이 수도원이나 인근 교외의 풍광 좋은 장소에서 생겨난다. ‘피정(避靜)’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는바 ‘피세정념(避世正念)’은 ‘세상을 벗어나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기존의 제도종교는 ‘신을 만나려면 나를 통해서’ 신은 하늘 저 높은 어딘가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존재하기에 차안(此岸)은 늘 피안(彼岸)을 위해 극기하고 희생하며 지고지순한 가치의 삶을 살라 말한다. 그리고 그런 규정과 제도, 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라 규정하고 ‘죄’를 정화하고 용서받고 보속하는 또 다른 제도를 고안해 낸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은 신약의 예수의 외침마냥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 말한다. 그리고 교회가 말하는 ‘냉담자’, 혹은 ‘가나안’ 신도들이 대량으로 생성된다. 가톨릭의 경우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수가 최근 전체 신자 대비 2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다. 100명 가운데 20명도 안 되는 사람들만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주일미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존 종교 안에서 듣던 설교나 강론 내용이 자구(字句)적으로 문자를 해석하는 수준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하고, 설교자나 강론을 하는 성직자들의 일상 이야기가 경전의 문장에 맞추어 떠벌려진다. ‘잘 살라’, ‘죄 짓지 말라’, ‘욕심을 버리고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는 성직자들과 교계가 세상 사람들도 생각하지 못한 탐욕과 범법 행위로 세상의 지탄을 받는 일들이 빈번해지니 이제 세상 사람들은 ‘종교가 뭐 그렇지’라며 푸념하고 제도 종교에서 멀어져 간다.
이미 프랑스 대혁명 시기(1789) 귀족들과 함께 수많은 교회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몽마르트 언덕에서 처형당했다. 아니 그 이전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을 때 철학의 중심은 이미 신(神)에서 인간인 ‘나(Ego)’에게로 이동했다. 근대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고 있었는데 교회는 뒤늦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교회의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직자들의 경제범죄와 아동성추행 등의 문제로 교회 운영에 치명상을 입은 교회는 새로운 해법을 모색한다. 그 무렵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과 변화를 위한 ‘말’을 가지고 변화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이제 종교의 시대는 저물어 간다. 이제 내가 하느님, 초월을 향해 ‘나를 넘어’ 서는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신학은 인간학으로 전향되어가고, 종교는 영성이라는 말로 넘어가고 있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나라일까?
정치에 대한 혐오가 계속된다.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라고 말하며 적폐 무능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과연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대안마련과 상상을 하지 못했다. 나라다운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지금 여기에서 꿈꾸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토마스 모어가 말한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에서 유래한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세계다. 토머스 모어(1516년)의 『유토피아』 출간 이후 『태양의 나라』 (토마소 캄파넬라, 1602년), 새로운 『아틀란티스』 (프랜시스 베이컨, 1627년) 등이 출간되며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화폐가 없고, 공동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에 대한 규정과 독서와 문화 활동 토론에 대한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고민들이 있다. 생산과 분배에서 자유로우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모색이 들어있다.
과연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누가, 왜, 어디서, 어떻게 유토피아를 말하는가? 그리고 나에게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지금 저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전쟁과 테러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아니, 가깝게 인천 화평동 민들레국수집에 찾아오는 노숙자들에게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따뜻한 밥 세끼에 사람대접 받으며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곳을 그들은 천국이라 말한다. 전쟁 중에 있는 이들은 총소리 듣지 않는 세상이 유토피아일 것이고,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세 끼가 아니라 끼니만 거르지 않아도 천국일 것이다.
예수를 믿다가 고문당하고 부모와 형제와 자식, 친구와 친척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생명마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이들에게 예수가 말한 평화의 세상은 천국이었을 것이다. 컨베이어 밸트에 끼어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과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고치다가 쓰러져간 젊은 청년노동자 김군에게는 정규직 일자리와 영양가 있는 식사, 그리고 따뜻한 휴식이 천국 이었을까? 천국은 어느 정도 살만한 사람들의 욕망이 충족되는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절대적인 빈곤과 무리한 노동으로 고통당하고, 인권탄압과 억압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해 주는 세상일 것이다.
군인들을 몰아내니 이제 검찰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고위공직자들을 수사하는 부서를 만들자는 것을 왜 반대할까? 선거를 보다 효율적인 장치로 만들기 위해 모든 국민들이 투표한 비율에 따라 국회의 의석을 나누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왜 거부할까? 정치인들은 하지 말아야 할 온갖 못된 짓들은 다 하면서 해야만 하는 일들은 하지 않고 세계 최고의 연봉을 챙겨간다. 노동자들에게는 ‘무노동 무임금’을 말하던 이들이 정작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액의 연봉을 챙겨가며 국민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한다.
광주에서 수 천 명을 죽게 하거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폐허로 만들었던 대통령이 법원 재판에는 가지 않고 경치 좋은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고 있다. 빵 하나를 훔쳐 징역을 수년 사는 청년이 있지만 수천 억대의 마약을 들고 들어와도, 밤새 유명 연예인과 향락의 밤을 지새우고 붙잡혀도 구속되지 않고 선처 받는 대기업 후손, 유력정치인의 딸을 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지금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액소더스’와 ‘메타노이아’
구약성경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된 노동과 굶주림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출애급을 감행한다. ‘액소더스’는 액스(~로부터 벗어나다)+호도스(길), 곧 ‘길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다.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 일상의 길, ‘걸어온 길’, ‘걷고 있는 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에서, 모두가 의문 없이 걸어가고 있는 길 위에서 ‘회개’(메타+노이아)하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출가(出家)’라는 말이 적절하다. 진정 ‘가야할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출가’는 불온하다. ‘출가’는 아무 생각 없이 돌아가는 평온한 세상이라는 호수에 돌을 던지는 행위다.
신약의 시대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한다. 회개(메타+노이아)하라는 것이다. ‘메타’는 초월을 말한다. 그것은 벗어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으로 가는 것이다. 중심으로 본질로 가는 것이다. ‘노이아’는 ‘노모스’ 규범, 규칙, 법, 규정, 생각 등을 의미하는 명사에서 파생되었다. 곧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규범과 규칙, 법과 규정이라는 생각의 핵심으로 본질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율법은 일점일획도 사라지지 않는다. 율법의 근본정신, 율법이 만들어진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 변방의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 메시아 운동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운동’으로 변화했고 이어 사도 바오로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지역의 ‘교회운동’으로 변화해 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원성사’이다. 보이지 않는 예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보여주고 말하고 생각하는 사명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방의 종교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 국교가 되면서(AD381) 그 동안 박해를 받으며 순수한 믿음을 지켜온 많은 이들은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결합하며 생겨나는 복음의 상실을 두려워하고 사막으로 광야로 떠나가기 시작했다. 광야의 은수자가 나타나고 사막의 교부들과 가파른 절벽 위의 수도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 안의 빛과 소금이 되어 위기의 시대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중세 교회의 부패와 향락, 음모와 협잡 가운데서 가난한 삶, 청빈한 삶이 교회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공동체 안에서 기도와 노동 고행으로 하느님의 길을 찾아왔다. 이후에도 교회는 그 정체성에 대한 도전들이 있었지만 위기의 시대에 등장한 성인성녀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넘겨왔다.
교회는 근대 이후 사람들에게 소외되기 시작했다.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객관적 설명들이 절대자의 창조만을 의심에 부친 것이 아니라 종교가 만들어 놓은 규범과 규칙, 규정과 법들에 대해 산업사회의 시민과 노동자들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대중들은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에 대해 실망은 물론이고 때로는 거칠게 교회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의 의제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갔고, 교회는 사교의 장으로 전락해간다.
어둠이 깊어진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말한다 했던가. 이런 암흑 같은 적막강산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과 상상을 지속한다. 교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새로운 시대의 교회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성직과 교계제도는 아직도 유효한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예배 공간은 온라인만큼이나 다양해 질 수 있을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교회의 대응은 너무나 안일하지 않은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요셉 라칭거 신부가 젊은 시절 적었던 글이다. 보수주의자로 여겨졌던 교황이 재임 중 또 다른 교황 프란치스코를 세운 일이나, 새로운 교회의 모습에 대한 단상을 적어낸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믿음의 작은 무리’를 생각하던 그의 노래에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생각해보자.
작은 교회
오늘의 위기로부터
또 하나의 교회가 솟아나리라
많은 것을 잃고 보잘것없이 작아져
거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교회
번영의 시대에 지었던 건축물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교회
신자 수는 격감하고 사회적으로 누리던
특권도 내려놔야 하는 교회
하지만 경험의 중심에
다시 신앙을 놓은 소수의 운동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교회
몹시 영적인 교회가 솟아나리라.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바람둥이 노릇이나 하며
자기의 정치적 중요성을
은근히 뽐냈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한결 영적인 교회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가 나타나리라
마침내 세상은 보리라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믿음의 작은 무리를!
세상은 얻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해답을!
자신들에게 희망이 될 작은 양떼를!
- 요셉 라칭거, 1969
⑴ 종교선호도 조사…‘호감 가는 종교 없다’ 43%, 가톨릭프레스, 2019.11.28
⑵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오강남, 현암사, 2019, 6-7
이 글은 <공동선> 2020년 1,2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