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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
  • 이기우
  • 등록 2020-02-26 18: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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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2020.02.26.) : 요엘 2,12-18; 2코린 5,20-6,2; 마태 6,1-6.16-18



오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사십 일 동안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수난의 길과 죽음에 동참하려는 묵상과 준비를 하는 때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이 날, 교회가 거행하는 재의 예식은 우리네 육신 생명이 언젠가는 재로 돌아갈 것을 상기시키는 한편, 육신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지향해야 할 목적은 영원한 생명임을 상기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자선이든 기도든 단식이든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식하여 행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내용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이는 유다교에서도 전통적으로 행해 오던 종교적 관습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관습의 전통을 계승하시면서도 근본정신에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초점은, 자선이든 기도든 단식이든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식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이 열심한 유다인들이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거창하게 행하면서 정작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겉치레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모아 산상설교에 담았습니다. 진복팔단으로 시작되는 산상설교는 무신론자들이나 우상숭배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도 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있어서도 철저할 것을 요구하시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듣는 이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또 믿으려는 그리스도 신앙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집요하게 추구하던 목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신 이유를 알지 못하면 결코 그분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마태오 복음 특히 산상설교의 그 엄격해 보이는 가르침의 대전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죄에 물든 인간을 용서해 주셨다는 사랑을 말합니다. 


흔히 잊어버리기 쉬운 노릇이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엄청나게 미리 주어져 있는 하느님이 이 압도적인 사랑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닫지 못하면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철저하게 하느님을 의식해서 행하라는 오늘의 복음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기억하고, 원래의 질서대로 되돌려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


기업의 영업활동이 생산과 판매로 인한 수지 계산으로 평가되려면 먼저 이루어진 선행 투자를 감안해야 하듯이, 우리네 인생과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어마어마하게 이룩해 놓으신 창조의 투자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과 세상은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창조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값비싼 희생을 치루고 당신을 저버렸던 인간과 화해하고자 하셨다는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전자가 창조의 신비라면 후자는 십자가의 신비요 구원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자선을 행하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나보다 더 필요한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결국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것인데, 생색을 내서는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되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가르침 또한 이미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듣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일방적인 방식의 기도로서는 하느님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 질 리가 만무합니다. 


단식하되 얼굴을 찌푸리지 말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먹는 일용할 양식이 모두가 함께 먹었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만 배불리 먹는 동안에 굶주리고 있는 이웃이 있으니, 이제는 그들도 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주어서 원래의 질서대로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절약된 몫을 이웃과 나누는 자선과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자선이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봉헌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기도와 연결되어야 마땅합니다. 기도함으로써 본래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자선의 행위가 가난한 이웃을 돕는 효과를 누리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대한 도리를 갚는 의미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는 전통적인 종교 행위가 습관적인 행사가 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이 되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십니다. 당신 외아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신 하느님과 화해하는 일, 그래서 관계가 정상화되도록 바로잡는 일이 이 사순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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